매일신문

중 아편전쟁 패배…영 손안에

1백50년 영욕의 역사가 교차한 홍콩의 반환이 6개월 앞으로 다가왔다.

홍콩은 대영제국의 지배하에 동양의 진주(東方明珠)로 탈바꿈하며 향목(香木)을 운반하던 작은 어촌이었던 당시와는 달리 현재는 인구 6백31만의 세계적인 상업, 무역, 금융중심 도시로 변했다.총면적 1천90㎢(서울의 1.8배)의 홍콩은 지리적으로 홍콩섬(港香島)80㎢,. 구룡반도(九龍半島) 46㎢, 신계(新界)7백90㎢, 도서(島嶼)2백80개 1백74㎢로 구분된다. 광동인(廣東人)이 88.2%%로 가장많은 홍콩은 복건인(福建人), 객가인(客家人), 조주인(潮洲人), 상해인(上海人) 기타순으로 분포돼있고 홍콩섬에 21%%, 구룡반도 32%%, 신계및 도서지역에 47%%가 살고 있다. 이밖에도 홍콩에는 필리핀, 중국, 미국, 영국등 8개국 이상의 외국인 44만6천여명이 거주하고 있다.아편전쟁후 이곳은 영국의 조차를 강요받게 돼 현재에 이르고 있다.

1841년 영국의 '파머 스톤'외무장관은 당시 홍콩은 사람이 없는 황무지라고 말했지만 중국측의주장은 전혀 다르다. 홍콩섬에는 중국인들이 대대로 생활해온 곳으로 영국 점령전부터 농.어업및향목운반업, 항해업, 소금생산, 진주채취업이 성행했고 인구도 당시 통계로 7천여명에 이르렀다고한다. 영국에 점령된 것은 아편전쟁 기간인 1840~1842년사이. 영국의 아편이 대중국무역에서50%%를 차지하는 양으로까지 증가되며 중국 전역에 아편이 확산, 경제파탄과 사회가 혼란되자청조(淸朝)는 흠차대신 임칙서를 광동에 파견, 영국상인소유아편 1천4백여t을 빼앗아 불태워 버렸다. 이 사건을 구실로 영국정부는 아편판매업자의 요구라는 명분아래 중국에 원정군을 파견, 1840년 6월에 아편전쟁을 일으켰다. 영국함대는 그해 7월, 백하구(白河口)에 도착했고 영국군은 하문(廈門)에 들어와서 정해(定海)를 공략했다. 중화사상에 젖어있던 청조를 간단히 굴복시킨 영국은'파머스턴' 외무장관을 통해 태워버린 아편의 금액배상과 해도(海島)등의 할양을 요구해왔다.청정부는 광동에서 영국과 교섭을 벌였고 영국측 전권대표 '찰스 에리오트'는 중국측에 홍콩섬할양을 정식으로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협상이 순조롭지 못하자 영국정부는 1841년 1월25일 병력을 다시 파견 홍콩섬을 점령함으로써 이때 체결된 것이 홍콩섬의 할양을 규정한 남경(南京)조약이다. 중국인들은 남경 조약을 두고 중국 근대사에서 최초의 불평등조약이라고 말하고 있다. 청조의 무기력함을 알게된 영국은 제2차 아편전쟁기간에 구룡(九龍)을 넘겨받았다. 1898년 4월 중.영은 홍콩의 계역(界域)확대범위를 둘러싸고 담판에 들어갔다. 영국공사 맥도널드는 총리부대신 이홍장(李鴻章)에게 삼천만에 이르는 선이남의 구릉을 비롯 많은섬을 포함한 토지와 수역을 계역확대범위(界域擴大範圍)에 넣겠다고 했다.

1898년6월9일 중.영간에는 홍콩계역확대전문조약이 북경에서 조인됐다. 이 전문조약에 의해 영국은 사두각해로부터 심천만(灣)에 이르는 최단거리직선 이남계한가(界限街) 이북의 광대한 지역과인근 2백85개의 부속도서를 비롯 대붕만(大鵬灣), 심천만의 수역을 99년간 조차하는데 성공했다.영국은 이후 홍콩을 아시아를 향한 교두보로 삼았고 홍콩은 영국지배하에서 서양문물을 받아들이는 창구역할을 하게됐다. 1911년 중국의 국부 손문선생에 의한 신해혁명이 성공, 청조가 무너지며홍콩은 중국의 변혁에 따른 대변화를 맞았다. 1941년 일본군점령전 홍콩의 인구는 1백60만이었으나 49년 일본군 항복시 60만명선으로 줄었던 인구가 48년 1백80만, 49년 중국공산화로 50년말에는 2백36만명으로 난민유입이 크게 증가했다. 중국 공산당이 들어선 이후에는 공산당 지도하에영국선주들에 대한 스트라이크 사건, 17개월간에 걸친 광둥, 홍콩노동자들의 파업등이 발생하며죽음의 도시로 변했다. 홍콩의 발전은 50년대 중국에서 대량으로 넘어온 값싼 노동력과 한국전쟁이 발판이 됐다. 51년 한국전쟁으로 인한 UN의 대중국 금수조치에 따른 반사적 이익과 60년대중반이후 월남전 특수및 세계적인 0黎綬 맞으며 급속한 발전을 가져왔다. 66년부터 10년간은문화대혁명으로 인한 난민유입도 값싼 노동력에 한몫했다. 70년대 들어서며 외국금융기관에 대한각종 제한 철폐와 80년대 중반부터 나타난 개혁, 개방정책에 따른 대중투자진출(주로 화남지역)시작은 홍콩을 세계적인 무역.금융도시로 변모시켰다. 중국정부는 1백여년간에 걸쳐 영국의 지배하에 있는 홍콩섬을 비롯한 구룡.신계를 찾기위해 눈을 돌렸고 지난 84년12월29일 중.영 양국정부수뇌부는 북경에서 홍콩문제에 관한 공동성명을 정식으로 조인하기에 이르렀다. 중국과 영국정부는1997년7월1일부터 홍콩에 대한 주권회복 및 반환과 50년간의 자치를 약속한 협정문서에 역사적인합의를 하게됐다. 1백54년전 불모의 암반소도에서 오늘의 국제금융, 무역센터로 발전한 6백30여만인구의 홍콩반환을 놓고 영국은 '번영하고 있는 아시아의 기지상실'이라는 아쉬움을 남기게 됐고 중국은 '굴욕과 치욕의 역사'를 청산하게 된 것이다. '동양의 진주', '금계란을 낳는 거위', '중국의 젖줄'이라는 이름으로 미화되고 있는 홍콩은 오랜 영국지배하에서 벗어나 일국양제(一國兩制)로의 새출발을 기다리고 있다.

〈香港.田東珪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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