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석자보다 '옥수수 박사' '한국의 슈바이처'로 더 잘 알려진 경북대 김순권 석좌교수(52). 두꺼운 점퍼, 청바지, 흙묻은 운동화에서 굵은 손가락 마디까지 그에게서는 '학자'라기보다 '농부'라는 인상이 더 강하게 묻어난다.
"저는 옥수수를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 이유가 듣는 사람을 미소짓게 만든다. 눈은 감으나 뜨나 차이가 없어 옥수수 꽃가루가 눈에들어오지 않는데다 깡마른 몸매가 옥수수 사이를 비집고 다니기에는 안성맞춤이라는 것이 김교수의 자랑아닌 자랑이다.
하지만 그의 옥수수 인생은 연속된 실패와 좌절이 빚어낸 작품이었다.
"힘들고 대접도 시원찮은 농사일이 누군들 좋겠습니까? 피하고 싶었죠"
울산농고 3학년때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취직시험을 쳤지만 낙방, 5·16 장학금으로 65년 경북대 농대에 가까스로 입학했다. 낭만섞인 청년시절의 방황을 곁눈질할 겨를도 없이 대학시절을 보냈다. 일하지 않으면 굶는다는 절박감과 함께 농업정책분야 교수가 되겠다는 목표가 그를 채찍질했기 때문이다.
고시준비생보다 더 일찍 도서관에 가서 늦게 귀가했고 길이나 버스에서도 단어장을 들고 다니며영어단어를 외웠다. 하지만 인생은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서울대 대학원 시험을 쳤지만 또다시불합격의 쓴잔을 마시게 된 것.
당장 먹고 살 길이 막막해진 그는 농촌진흥청 작물시험장 연구사보로 취직한다. 여기서도 좌절은이어진다. 전공했던 통일벼 대신 옥수수육종 분야에 자리가 빈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옥수수육종으로 방향전환을 하게 되었고 이것이 그가 옥수수박사로 커가는 전환점이 됐다.그는 이 모든 과정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설명한다.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았던 일이 많았지만실패 역시 하나님의 뜻이기에 어떤 좌절도 자신을 꺾을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고등학교 2학년때좋아하던 여학생을 따라 교회에 갔다가 신자가 된 그의 인생은 한편의 신앙고백과도 같았다.김교수가 농촌진흥청에 들어간 69년 당시 국내 옥수수 재배농가의 3백평당 수확량은 불과 1백50kg. 미국의 3분의1에도 못미치는 수준이었다.
이때문에 71년 선진 육종기술을 배우기 위해 미국으로 떠나 3년3개월 만에 하와이대학에서 석·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미국생활 역시 현지인들로부터 '이런 독한 인간은 본 적이 없다'는 두려움섞인 칭찬을 들을만큼 치열한 것이었다. 생옥수수로 점심을 때우며 눈뜨고 있는 시간은 모두 연구에 쏟아부었다. 치질수술후 의사의 만류를 뿌리치고 퇴원해 연구에 몰두하다 수술부위가 터져병원 응급실로 실려간 일도 있었다.
77년 마침내 우리 토양에 맞는 옥수수 교잡종 육종기술을 품고 귀국했지만 일은 뜻하지 않던 곳에서 꼬였다. 실패할 것이 뻔한 교잡종 시범재배에 거금을 쏟아붓는 것은 가당찮다는 여론이 거셌기 때문이다. 실패할 경우 자리를 내놓겠다는 다짐을 하고서야 시범재배가 시작됐다. 피를 말리는 작업이었다.
김교수는 "행여 결과가 나쁘면 어쩌나, 걱정을 너무 했더니 머리카락이 빠지기 시작해 이 지경이됐다"며 성긴 머리칼을 쓰다듬는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수확량이 90%%이상 증가하고 옥수수 재배농가의 소득 역시 3배나 늘어났다. 성공이 확인된 순간 김교수는 밭에서 옥수수를 부여잡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고 회고한다.이를 계기로 김교수의 옥수수 인생은 본격화됐다. UN산하 국제열대농업연구소 초청으로 아프리카 식량난 해결을 위해 나이지리아로 가게된 것이다. 16년간 계속된 그의 아프리카 연구에서는토양에 맞는 교잡종 개발외에 '스트라이가'연구가 눈길을 끈다.
'악마의 풀'로 불리는 스트라이가는 강한 제초제를 뿌리면 돌연변이를 일으켜 오히려 더욱 번성하는 잡초로 선진국들도 방제에 실패했었다. 김교수는 이를 완전제거하기보다 최소한의 영양분을공급, 생존할 수 있도록 하면서 스트라이가와 공생할 수 있는 강력한 옥수수 품종을 개발해낸 것이다.
옥수수 수확량이 3배로 늘어나면서 80년대초 1백만ha에 불과하던 재배면적이 95년 3백만ha까지증가했다. 아프리카에서 옥수수가 수입밀을 대체하는 주식량및 공업용 작물로 떠오른 것이다. 이같은 결과에 아프리카인들은 그를 '옥수수의 아버지'로 추앙하게 됐다. 나이지리아 정부는 그가개발한 옥수수를 동전에 새겨넣었고 명예추장인 '마이에군'(가난한 자를 배불리 먹인 자)으로 추대했다.
노벨상 후보추천이 자연스럽게 거론되기 시작했다. 나이지리아 전 대통령 오바산조 장군 등 저명인사들이 그를 후보로 추천했다. 국내에서는 대한적십자사 강영훈총재와 경북대 박찬석총장 등이공동위원장을 맡은 준비위원회가 수상을 활발히 추진중이어서 우리나라 최초의 노벨상 수상가능성을 높여주고 있다.
현재 김교수의 당면목표는 북한의 식량난을 해결할 수 있는 '슈퍼 옥수수' 개발. 북한주민들이 홍수 피해 때문에 극심한 식량난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95년 귀국한뒤 꾸준히 매달려온 일이다.
북한의 토양과 기후에 맞는 품종을 개발하면 기아해결은 물론 남한으로 수출도 가능해 옥수수가'평화와 통일의 씨앗'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난관도 적지 않다. 얼마전 일어난 옥수수 도난사건역시 그중 하나.
그러나 실패를 오히려 또다른 성공의 계기로 삼는 그는 모든 일들을 담담한 마음으로 받아들인다.
"입시에 실패했다고, 성적이 떨어졌다고 좌절하는 신세대들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실패, 좌절은 인생의 전환점을 마련해주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슈퍼옥수수 개발이든, 인생에서든 저의이 생각은 변치 않을 것입니다"
댓글 많은 뉴스
국힘 김상욱 "尹 탄핵 기각되면 죽을 때까지 단식"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민주 "이재명 암살 계획 제보…신변보호 요청 검토"
국회 목욕탕 TV 논쟁…권성동 "맨날 MBC만" vs 이광희 "내가 틀었다"
이재명, '선거법 2심' 재판부에 또 위헌법률심판 제청 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