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우리사회가 이렇게 살벌해졌나.
비록 가난했지만 적은대로 서로 나눠먹고 때론 등을 토닥거려주면서 이리 부대끼고 저리 비비며얼기설기 살아왔던 그 시절의 구들목같은 정이 간절한 요즈음이다. 그때는 그래도 잘사는날이 올것이라는 소박한 희망이 있었다. 사람들을 만나면 사람냄새가 났다. 안주도 변변찮은 막걸리 몇잔에 취해 횡설수설 욕지거리를 하며 실언을 해도, 취했거니 그저 허허롭게 받아 주기도 했고 또그렇게 하루 지나치면 반가운 이웃들이었다.
*등이 휘게 일해왔는데…
사람냄새만 있는게 아니었다. 산내음도 흠씬 했고 물내음도 싱그러웠다. 구두가 좀 낡고 옷이 후줄근해도 부끄러움을 모르고 살았다. 살맛나는 사람들이 사는 인간세상이었다. 그런 세상이 왜 이렇게 메마르게 변해 버렸나. 요즈음은 사람들을 만나면 기계냄새가 난다. 갖은 가전제품에, 수십평짜리 아파트에, 승용차를 몰고 다녀도 풍요한 행복은 커녕 맘은 항상 허기뿐이다. 시멘트냄새에섬뜩 냉기만 느껴진다. 더 쫓기고 불안한 맘을 잠시라도 떨쳐 버릴수가 없다. 내가 살기위해선 남을 따돌려야 한다. 때론 수단·방법가리지 않고 무자비하게 짓밟아 버려야 한다. 가족을 위해 가장(家長)은 그 어떤 수모도 참고 견뎌야 한다.
때론 나라를 위해 또는 회사의 실적을 위해 신새벽부터 한밤중까지 내 한몸 헌신짝처럼 무리를거듭해야 한다.
몸이 찌뿌둥해도, 건강염려증에 불면의 밤을 지새운 이튿날에도 일터로 잽싸게 가야만 한다. 싫어도 웃어야 한다. 무능하지 않으려고 날로 새로워지는 기계도 익혀야 한다. 잔무를 집에까지 가져왔다는 아내의 타박이 심해도 밤새워 처리해야 한다. 세계화라고 해서 막내동생이나 자식뻘밖에안되는 젊은이들속에 섞여 영어회화건 일어건 어설프나마 익히고 또 익혀야 한다. 컴퓨터학원에도 가서 굳은손을 풀어야만한다. 이미 열사(熱沙)의 이국 건설현장도 외롭게 지켜냈다.가방만 달랑 들고 미수교국 관리도 만나라면 무슨 수를 쓰든 만나 거래를 터놓고 와야한다. 그래야만 고2짜리 과외비도, 대학1년짜리 등록금도 해 댈수 있다. 변변한 유산도 없고 헐할때 개발지수백평 땅이라도 못잡아 놓은 무능을 탓하며 소처럼 일에만 매달릴 수밖에 없다. 남의 나라 전쟁에 목숨을 담보로 피를 흘리며 달러도 벌어왔다. 그덕에 군(軍)장비도 갖춰놨다. 부동산 잘 굴린졸부들이 해외여행나들이 할땐 애들 출가시켜놓고 정년후 퇴직금받아 고생한 아내와 함께 가겠다고 쓴 소주로 맘 달래기도 했다.
*난데없이 名退라니
이젠 피곤해 좀 쉬어야겠다는 생각이 들 무렵 몸속에서 자란 암세포가 이미 번져 시한부 삶을 살다 먼저 간 동료나 이웃들의 사연을 종종 듣기도 한다. 충격도 잠시뿐, 회식이라면 상대가 고객이든 직장상사이건 때론 동료이건 억지웃음에 독하고 쓴 술을 마셔야 한다. 집식구들은 또 술이냐하지만 속보일수 없는 가장의 비애이다. 취중에 이게 내인생이 아니라며 당장 치우겠다던 그 직장을 아침 눈이 뜨이면 기계적으로 또 나가야 한다. 정신없이 살다보니 어언 50줄이고 지난날보다 짧은 남은날을 자꾸 셈하게 된다.
따로 모은돈도 없고 자식들 대학졸업도 멀었는데 어느새 후배들은 줄줄이 압박해 들어오고 있다.막연한 불안감이 엄습하는데 경기가 나빠진다는 소리가 잦아진다. 무역장벽도 더 이상 우리만 고집할 수 없다며 불원 국내시장을 세계무대로 활짝 열어야 한단다.
이젠 외국기업과의 기약없는 경쟁을 치러야 한다는 강박감에 대책없이 또 긴장을 한다.벌써 경쟁업체 몇곳에선 감량경영체제를 굳혀 과장·부장·이사 수십명을 명예퇴직 시켰다는 소식에 겁이 덜컥 난다. 자기만 바라보고 있는 집식구들의 얼굴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윗사람 눈치보는 습관이 몸에 배고 집식구들 동정도 이것저것 챙기면서 회사내의 정보수집에 신경이곤두선다. 실직 가장의 피말리는 생활을 테마로 한 TV 드라마 몇편을 본뒤엔 영 식욕까지 가신다. 어느 '고개숙인 아버지'는 퇴직금까지 사기당하고 정신착란증이 발작, 끝내 자살하고 마는 충격적인 대목이 좀처럼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날치기 노동법에 분노만
이럴즈음 청천벽력의 '정리해고 노동법'개정 뉴스가 머리를 강타한다. 기업경쟁력제고를 위해 여당국회의원들만 새벽에 모여 날치기 통과시켰다는 소식과 노총이 결사항쟁파업에 돌입했다는 내용이 전해진다. 대승적 차원에서 유일하게 선택할 수밖에 없는 구국의 결단이었다는 김영삼대통령의 배경설명이 육성으로 곁들여졌다. 그순간 생각할수록 분하고 강한 배신감에 치가 떨린다. 평생을 짐승처럼 부려먹고 이제와서 정리해고를 해? 4년전 '김영삼'이름석자에 기표를 한 손이 부르르 떨린다. 근로자들의 '피와 땀의 결정체'를 오도(誤導)한 대통령 이하 정부당국자의 실정(失政)이 파국의 근본원인이며 호황시절 딴짓거리로 경쟁력 약화를 자초한 기업주들에게 더 큰 책임을 지워야 옳다. 이치가 이러한데 소처럼 죽는시늉까지 하라면 마다 않고 묵묵히 피땀흘린 근로자들의 일방적 희생만 결코 강요당할 순 없다.
이땅의 모든 근로자 가장들이 지금 겪고 있는 고통과 삭이지 못하는 분노의 시말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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