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78년 1월 충북 단양군 하방리 적성에서 적성비가 발견되었다. 마운령비의 발견이후 50여년만의 쾌거다. 지금까지 적성비의 성격에 대해서는 척경비설등 다양한 가설이 제기되고 있다. 적성비의 진정한 의미는 당시 고구려, 백제의 금석문 자료와 비교할 때보다 선명하게 드러난다. 고구려의 광개토대왕비나 중원고구려비의 주된 내용은 각각 광개토대왕의 업적과 능묘관리, 장수왕의아들인 고추대가 조다의 업적이다. 백제의 사택지적비에서는 한 귀족이 노장적인 사상에 젖어 은둔하여 절을 짓는 것을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에비해 적성비에서는 적성을 지키다가 죽은적성비의 주인공 야니차와 같이 신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면 그 자식이 어른이든 아이이든, 아들이든 딸이든 상관하지 않고 포상하겠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6세기 중엽 고구려, 백제, 신라는 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각국의 영토확장을 위해 전쟁을 하고 있었다. 한강 유역인 적성에 말로써도 아니고, 나무나 종이에 쓴 글자로써도 아니고, 영원히 남을돌에다가 일개 지방민을 위해 왕의 약속을 새기고 있다. 정부의 약속 이행의지와 지방민의 정부에 대한 신뢰가 합친 것이 바로 적성비이므로 국경지방의 백성들에 대한 파급효과도 컸을 것이다. 지방민의 배려에 관한 금석문 자료는 고구려와 백제에서는 단1기도 발견된 바 없으나 신라에서는 냉수리비등 많은 예가 있다. 적성비에서와 같은 백성들에 대한 배려는 국경지역 사람들을신라인화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고, 뒷날의 삼국통일과도 무관하지 않다. 남북통일의 사명을 띠고있는 오늘날의 우리에게 적성비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경주대교수·금석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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