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경주남산-키작은 탑들

남산의 탑은 우람하지않다. 불끈 치솟아오른 근육을 자랑하는 보디빌더의 남성미를 남산의 탑들에게선 기대할 수 없다. 그렇다고 화려하지도 않다. 쭉 뻗은 각선미와 풍만한 가슴을 자랑하는 할리우드 여배우의 섹시함을 눈 씻고 찾아봐도 발견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린 남산에서 우리모습을 빼닮은, 그래서 가장 한국적인 탑들을 만날 수 있다. 설날 고향집 동구녘에서 온종일 목 빼고 손자손녀를 기다리는 할머니 같은 표정으로, 시장바닥에서 찬거리를 파는 인심좋은 아낙의 미소로 남산의 탑들은 그 자리를 지키고있다. 때론 엄마등에 업혀 첫바깥 나들이를 하는 젖먹이의 천진한 눈망울로도….

남산의 탑은 산골짜기와 봉우리 곳곳에 산재했다. 오죽했으면 삼국유사를 쓴 일연이 남산의 탑들을 보고 '줄지어 날아가는 기러기떼와 같다(塔塔鴨行)'고 했을까.

그러나 남산의 탑은 대탑(大塔)이 없다. 지금까지 발견된 남산 석탑중 가장 큰 창림사터 석탑이고작해야 7m가량. 또 폐허로 남은 절터에서 발견된 석탑의 잔해를 추정해봐도 7m를 넘는 것이드물다. 대개가 3~5m 가량의 소박한 탑들이다.

같은 신라사람들이 세웠다는 황룡사목탑이 대구 동아쇼핑센터(지상 12층 지상높이 64.6m)보다 훨씬 높은 80m, 또 감은사지 석탑이 13m인것과 비교해봐도 남산의 탑들은 겸양지덕(謙讓之德)이이만저만이 아니다. 게다가 남산에 10m가 넘는 거불(巨佛) 약수골 마애불상이 있고 머리크기만도1.53m가량(전체추정 길이 10m71)되는 철와골 불상머리가 발견됐다는 사실을 깨닫고 보면 왜 탑들만 키작은 모습을 했을까하는 의문이 더해진다.

남산 탑들이 나지막한 높이로 조성됐던 수수께끼의 한가닥을 풀기위해선 용장계곡의 용장사터 삼층석탑과 탑골을 올라가봐야 한다.

용장사터탑은 용장마을입구에서 2km가량. 거친 암벽을 기어 이마에 땀방울이 알알이 맺히고서야맞선을 볼수 있는 거친 봉우리 정상에 자리잡고 있다. 산자락 아래 멀리서도 봉우리를 올려다보면 용장사탑은 드문드문 자태를 드러내 자신의 위치를 쉽게 알려준다. 산죽(山竹)이 인도하는 좁은 길을 따라 정상에 올라서야 가쁜 호흡을 내쉬고 비로소 합장(合掌)하는 탑. 어, 그런데 이게웬일인가?

한치도 흐트러짐 없는 양식과 엄격한 규칙을 요구하는 불교미술에서 엄청난 파격이 이 탑에 가해지고 말았다. 탑의 터를 돋우는 기단은 하층.상층으로 나뉜 2중으로 하게 마련인데 하층기단이 간데가 없다.

천년세월의 풍상탓에 하층기단이 유실된 걸까? 그게 아니다. 유심히 살펴보면 탑을 받치고있는거대한 암반 봉우리전체가 하층기단을 이루고있다. 탑아래 암반에서 위를 올려다보면 거대한 바위봉우리와 탑이 혼연일체가 되어 웅장한 탑을 이루고 만다.

높이 5m가량의 작은 탑이 바위봉우리와 어우러져 20여m이상의 웅장한 대형석탑으로 변모하는착시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런 흔적은 암반봉우리에 탑의 석재들만 남아있는 잠늠골석탑과늠비봉석탑에서도 더듬어 볼수있다.

탑골 삼층석탑 역시 바위곳곳에 부처의 모습을 새긴 바위와 입체불상 동남쪽 둔덕에 가장 높게치솟아있다. 4.5m밖에 안되는 난쟁이 탑이 주위에선 가장 높은 둔덕에 위치해 멀리서도 쉽게 보인다. 탑골의 명칭도 이곳 석탑이 등대처럼 드높게 솟아 있는 것처럼 보여 붙여진 이름이다.이렇듯 남산의 탑들은 천혜적인 자연조건에 의지하여 세운 까닭에 비록 작다하더라도 하늘높이빼어난 느낌을 주고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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