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수(烽燧)는 낮에는 연기, 밤에는 횃불을 올려 변경의 위급상태를 중앙에 알리는 선조들의 통신수단이었다.
현대의 정보통신망과 흡사한 선로를 갖춘 통신망인 봉수제도는 선조들이 고안한 훌륭한 통신문화유산이자 정보통신의 뿌리다.
중국의 만리장성봉화, 아메리카 인디언의 단거리 연락 신호방식, 그리스의 암어(暗語)화 봉화체계등 세계적으로 여러 봉수제도가 있다. 그러나 중국의 봉화는 만리장성 성벽을 따라 설치돼 그 숫자는 많지만 망의 구성이나 보고체계가 우리처럼 조직적이지 못하다. 또 인디언이나 그리스 봉화체계는 개인이나 성곽사이의 단거리에 국한 될 뿐 망 구성이나 중계체제까지 발전되지 못했다.이처럼 봉수제도는 세계의 많은 나라에서 발생되고 계승되었지만 우리의 5단위 봉수부호체계와 5방향의 노선설정은 세계에서 유래가 없는 독특한 것이다.
경희대 전파공학과 진용옥 교수는 "봉수의 전송매체가 불빛과 연기의 가시광이라는 점에서 광통신이라 할 수 있고 부호화과정을 거치는 점에서 컴퓨터부호와 데이터통신의 원조라 할 수 있다"고 그 우수성을 지적했다.
특히 봉화의 부호체계는 디지털통신과 컴퓨터체계의 원천이다. 전달하고자 하는 정보를 디지털형태의 5단위 부호방식으로 변환, 연기나 횃불이라는 빛의 매체에 실어보냈다는 점에서 컴퓨터통신이나 광파통신의 원리와 동일하다.
또 봉수제도가 중개방식으로 따지면 마이크로파 통신과 유사하게 직진거리로 전달되는 광파통신의 일종이라는 것. 산정에 설치했던 봉수대의 위치가 오늘날의 마이크로 웨이브 중계소의 위치와일치되는 곳이 많은 것에서도 선인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이같이 봉화는 현대의 정보통신 원리와 신통하리만치 일치, 당시의 하이테크원리가 오늘의 통신수단으로 이어지고 있다해도 지나치지 않은 것이다.
5개의 불구덩이를 이용해 정보의 종류에 따라 거화(炬火)개수를 달리한 봉수의 부호체계는 불연속적인 디지털방식이라 할 수 있다. 봉수의 부호체계를 디지털관점으로 보면 수많은 국경상황에관한 정보가운데 5가지만 추린 '표본화과정'을 거쳤다. 5개의 구덩이를 조합하면 총 32개의 정보를 전달할 수 있는 것이다.
또 위급의 정도에 따라 횃불의 개수를 달리하는 부호화과정, 불을 지피거나 지피지않는 신호방식으로 정보를 실어보내는 변조과정을 거쳤다고 할 수 있다.
봉화연기의 경우 회색빛을 이었다 끊었다하는 방식은 마치 스위치를 여닫았다하는 스위치변조와도 같은 원리다.
1419년 조선세종때 완성된 5단위 부호방식은 세계적으로 유래가 없는 방식. 거화방법은 해상과육상을 구별했다. 아무일도 없을때는 야간에 횃불로 낮에는 연기로 각각 1거를 올리고 해안지방은 적이 바다에 나타나면 2거, 해안에 근접시 3거, 아군의 함선과 접전하면 4거, 왜적이 상륙했을때는 5거로 하였다. 육지의 경우 적이 국경에 나타나면 2거, 국경에 근접하면 3거, 국경을 침입하면 4거, 아군과 접전하면 5거씩 올리도록 했다. 또한 봉수제도는 정보를 신속히 전달하는 것 외에도 인근 주민들에게 정보를 알림은 물론 다른 진영의 군사에게도 정보를 알려 동원준비를 하게하는 등 국방통신의 역할도 수행했다. 봉수신호가 1개 일때는 아무일도 없다는 것을 의미해 국민들은 봉수신호를 보고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봉수는 경(京)봉수, 연변(沿邊)봉수, 내지(內地)봉수 등 세종류로 구분되었다. 경봉수는 전국의 모든 봉수가 집결하는 중앙봉수로서 서울 남산 능선위에 5기가 설치, 목멱산 봉수라 불렀다.연변봉수는 국경선이나 해륙변경의 제 1선에 설치하여 연대라 부르기도 했다. 이것은 통신시설로서뿐만아니라 국경초소 또는 수비대 역활도 겸하였다. 내지봉수는 경봉수와 연변봉수를 겸하는중간봉수로 전국에 6백23개소나 되었다.
봉수대사이의 간격은 내지봉수의 경우 서울에서 먼 지역은 20~30리, 서울에서 가까운 지역은40~50리가 기준이었다. 전국의 주요 선로를 직봉이라 불렀으며 5개의 루트가 있었다. 그중 제 1루트는 두만강변 우엄-함경도-강원도-양주 아차산에 이르는 봉수망이며 제 2 루트는 부산동래다대포-경상도-충청도-광주 천림산에 이르는 선로, 제 3 루트는 평안도 강계-황해도-무악 동봉,제 4 루트는 신의주- 서해안-무악서봉에 이른다. 제 5루트는 전라도-충청도-강화도-양천 개화산에 이르는 선로였다.
국경에서 서울까지 봉수의 도달시간은 얼마나 걸렸을까. 북로 봉수의 제 1 기점인 함북도 경흥의화저중암으로부터 서울까지의 소요시간은 대략 12시간. 삼남지방 및 황해도와 평안도로의 봉수도초저녁에는 서울에 도달했다. 이렇게 초저녁무렵 매일 각 선로의 봉수가 도달하는 시각이 정해져있었다.
이처럼 봉수는 신속한 정보전달을 가능케했고 국가의 안위와 백성의 태평한 생활을 가늠해볼 수있는 선조들의 독창적인 통신수단이었다.
봉화는 사라졌지만 과학적 통신원리는 현대의 문명이기로 전해져오고 있다.
〈李春洙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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