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품개발을 한 뒤 염색가공공장에 시제품 생산을 의뢰해 놓고 나면 얼마안돼 다른 업체에서 엇비슷한 원단이 상품으로 나옵니다"
업체 규모는 작지만 연구개발에 열성인 제직업체로 알려진 ㅇ섬유 사장은 타사제품 베끼기 행태가 섬유업계가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중의 하나라고 지적한다.
그는 "95년초 '피치스킨' '천마' '빙마' '스펀텍스' 등이 해외시장에서 반응이 좋자 너나없이 같은 품목을 만들어내 당초 4~5달러 수준이던 수출가격이 절반으로 떨어졌다"고 말한다.섬유인들 사이에는 '신제품 개발이나 제품 차별화를 하는 기업은 망한다'라는 자조적인 말이유행될 정도로 베끼기 풍조는 섬유인들의 연구개발 의욕을 저하시키고 있다.
지역에서 생산되는 제품중 자가브랜드로 수출되는 '얼굴있는 제품'이 전체 수출물량의 8.6%%에 불과하며 나머지는 해외바이어에 의존하는 OEM(주문자 상표부착)방식으로 팔려 나간다. 따라서 그동안 지역섬유산업은 제품개발보다는 얼마나 많은 물량을 싼값에 공급할 수 있느냐에 관심이 많았던 것이다.
섬유업계가 당면한 불황의 원인은 수출경기의 침체보다는 이처럼 업계내부의 구조적 문제에 있다는 것을 섬유업체들도 자인하고 있다.
연구개발에 힘쓰지 않고 옆집 제품이나 '커닝'해 같은 제품을 만들어 수출하다보니 당연히 과당경쟁으로 인한 덤핑수출은 뻔한 이치다.
무역상사 한 관계자는 "홍콩시장에서 한국직물의 가격에 대한 신뢰도는 바닥 수준이다"며 "한국인 에이전트(중개상)는 현지 바이어들에게 야드당 1달러를 제시해 놓고 다음날엔 90센트로 낮추고 그 다음날에는 다른 한국인 에이전트가 찾아와 같은 제품을 85센트로 사라고 하는 일이 다반사이다"고 말한다. 수출창구의 난립이 덤핑수출을 부추기고 있다. 수출참여상사가 6백개이며 1년에 1~2회정도 직물을 수출하는 군소창구가 1천3백여개에 이른다.
이처럼 치열한 가격경쟁은 결국 해외 바이어들의 농간으로 수출가격을 턱없이 떨어뜨리는 결과를초래하는 것이다.
덤핑을 방지하기 위해 수출지도가격이 존재하지만 유명무실하다. 업체들이 수출조합의 추천을 받기 위해 지도가격 이상의 수출가격이 기재된 신용장을 받아 오지만 대부분 업체들이 선적후 일정액을 바이어에게 되돌려 주는 형식으로 이면계약을 하고 있다.
지역직물업계가 안고 있는 수출구조의 문제점은 품목 및 수출시장의 편중화를 꼽을 수 있다. 홍콩과 중국이 전체 수출시장중 35%%의 비중을 차지하고 여기에 중동까지 합하면 전체 시장의50%%에 달한다. 이들지역에는 봄여름용 얇은 직물이 주로 수출된다. 이들 시장에 조금의 변수만발생해도 수출전선에 엄청난 타격을 주게된다. 지난해 홍콩, 중국지역의 수출물량이 7~8%% 줄어여기에 따른 재고가 중남미까지 출혈수출되는 등 수출시장의 대혼란을 초래하게 됐다. 이같은 현상이 중견업체들까지 부도로 몰아넣은 원인이라는 것이 업계의 분석이다.
구조개선사업 대상중 쟁점으로 부각되고 있는 것은 과잉시설에 대한 문제다.
현재 대구경북지역내 등록된 워터제트룸 직기는 3만3천여대이다. 그러나 업계에서는 무등록 직기를 포함한 실제 직기대수는 4만2천여대로 추정하고 있다.
업계는 이들 직기중 적게는 5천대 많게는 1만2천대가 과잉시설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직기대수가과잉이라는 것도 문제이지만 더 큰문제는 워터제트룸이란 직기는 범용제품의 양산을 위한 직기로향후 차별화, 고부가가치 제품을 만들기에는 부적당하다는 것이다.
이와함께 섬유인들의 '기업가 정신'부재도 업계가 안고 있는 병폐의 하나로 지적되고 있다.업계 원로중 한 사람은 "아직까지 '한탕주의'가 만연해 있다. 기회를 봐가며 몇년 고생하더라도 경기만 좋으면 한 번에 빼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꼬집는다.덤핑수출방지와 재고직물을 담보로 업체의 운전자금을 대출해 주기 위해 설립된 대경직물상사의역기능이 노출되는 것도 업계의 기업윤리 부재때문이다.
대경직물상사 창고에 원단을 맡기고 돈을 빌려쓴 뒤 돌아서면 같은 제품을 다시 만들고 있다는것은 업계의 공공연한 얘기다.
업계 공동이익을 위해 만든 대경직물상사가 제몫만 챙기려는 섬유인들로 인해 악성재고 등으로운영의 어려움을 겪게 된 것이다.
이같은 문제는 어제 오늘 지적된 것이 아니다. 문제는 지금까지 그 어떤 단체나 업계원로들도 이를 개선하려고 앞장서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본격적인 구조개선에 착수할 움직임이다. 업계의 대전환을 기대해 본다.
〈金敎榮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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