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날치기 소동으로 온 나라가 들썩대는 와중에 때마침 한보사건마저 불거져 나와 연일 어지러운 기사들이 매스컴을 채운다. 이른바 날치기소동이라는 것은 시민사회의 정치적 기본권에 관한오래된 주제이고, 다른 하나는 이른바 정경유착의 혐의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일견 사안이 다르고, 따라서 따로 따져야 할 문제인 것처럼 보인다.
*날치기 사건과 한보
그러나 특별히 우리 사회의 경우, 이 두문제가 대표하는 민주화와 산업화는 별개의 것이 아니다.근대화란 워낙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두가지 목표를 조화롭게 이루어가는 과정이어서 그렇기도 하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산업화와 민주화란 속깊이 서로 내조하고 상부(相扶)하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70~80년대가 겪어야 했던 여러가지 어려움과 파행은 바로 이 두가지의 목표를 향한 우리의 발걸음이 심한 불균형을 이루었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산업화의 큰 기치를 내건 오른발은 신발끈조차 제대로 묶지 않은채 줄행랑을 쳤고, 민주화라는 조그만 표어를 붙인 왼발은 아예 신발조차도 신지도 못한채 질질 끌려온 셈이었던 것이다. 다 아는대로, 우리의 '민중운동'은 그 졸속한 행진이 그나마 제모습을 유지할수 있도록 채근한 대항세력이었다.산업화를 민주화의 빛에서 보지 못한 것은 그간 대다수 국민의 실책이었다. 마찬가지로, 국민소득1만불을 달성한 지금, 지표적·물량적 근대화의 겉모습을 그 속내의 빛에서 보지 못하는 것이 또한 지금 우리 대다수 국민의 단견인 것이다. 표층근대화의 휘광아래 심층근대화는 더욱 요원해지고 있는 것을 아는가, 모르는가. 한보사건이나 국회 날치기 법안통과는 넓게 보아 같은 뿌리에서나오는 에피소드다. 낱낱의 사건에서 벗어나 근대적 시민사회로 이행하는 우리 역사의 과정으로시야를 넓히면, 지난해 연말의 국회 날치기 법안통과 사건이나 연일 뉴스의 앞머리를 장식하는한보사건은 영락없는 쌍생아다. 대개 쌍둥이의 출산은 경사이지만, 그런데 이 쌍생아는 기형아인것이 매우 상서롭지 못하다.
*한뿌리서 나온 두 기형아
옛사람들은 기형아나 기형동물의 출산을 단순히 뉴스거리로 보지 않았다. 그것은 한 시대가 속한기운의 성격을 드러내는 징조이며 상징, 그러므로 천기(天機)로까지 여겨졌던 것이다. 내가 보기에, 이 두 기형아는 요컨대 졸속의, 부조화의, 그러므로 내실없는 근대화의 시대가 수태한 부작용의 결정이며 그 불온한 시대의 상징이다.
유달리 역사의식이 박약하고 절맥의 수모가 깊은 우리의 경우 시론(時論)이란 그 글의 성격상 매우 위험할 수 있다. 간단히 밝힌대로 대체로 우리 사회의 고질적 문제들은 역사와 구조의 뿌리를지니고 있는데 반해서, 시론이란 그 이름과는 달리 매우 비역사적인, 즉 공시적(共時的)인 일람과분석이 지배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사회를 뒤흔들고 있는 한보사건과 국회날치기 사건도 이런뜻에서 시론이 아닌 사론(史論), 혹은 사론같은 시론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된다.*파행적 역사의 산물
정리하자면 이런 부류의 문제들은 모두 우리 한반도에서 벌어진 근대화의 뒤안, 즉 그 근대화의특이성이 가져온 파행의 연장선에 있는 것들이다. 서양의 식자층에서는 요즈음 그들 자신의 근대성을 비판하는 소리가 드높아 마치 지적 유행이라도 된 느낌이 들 정도다. 우리의 산업화와 민주화도 대체로 서구화의 과정을 좇아온 것이므로 이러한 '근대성 비판'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그러나 서양의 근대성 비판이 앞서 지적한 우리의 근대화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대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우리 근대사의 특이성, 그리고 그 특이성을업보처럼 짊어지고 이루어온 근대화의 성격을 제대로 읽어내는 것이야말로 국회 날치기 사건과한보사건이 상징하는 우리 현실을 바르게 이해하는 길이다. 그리고 특별히 우리 식자의 경우 이해가 성숙으로, 성숙이 변혁으로 이어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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