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년 10월 7일. 전국 최초의 지방은행으로 대구은행이 개점한 이날은 국내에 지방 금융시대가 본격 개막된 날로 기록되고있다. 대구은행의 개점은 지역경제는 물론 서울위주로 운영되던 국내 금융사에 한 획을 그은 날로 평가되고있다.
대구은행의 태동은 제2차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첫해인 지난 67년 1월17일 고박정희대통령의 연두교서에서 비롯된다. 이날 박대통령은 "지역자본을 집대성하여 지방사회발전에 기여함은 물론 내자동원을 위해 지방은행의 설치를 검토추진할것"이라고 선언했다.
곧이어 다음날 서봉균 재무장관은 "연두교서에 따라 대구, 부산, 광주에 지역경제개발에 필요한자금확보책의 하나로 지방은행 설립희망이 있으면 관계법규에 어긋나지않는한 이를 허가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새해들자마자 지역 숙원이었던 지방은행 설립에 관한 정부방침이 확정되자 대구상공계의 움직임도 바빠지기 시작했다.
연두교서가 발표된지 1주일만인 1월23일 대구상의 의원, 경북중소기업협동조합 이사장등 상공계대표 43명이 상의에 모여 가칭 '대구은행 설립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5명의 전형위원을 뽑아 각업종을 대표하는 15명의 발기인을 선출했다.
15명의 발기인들은 대표에 여상원(대구상의회장), 상임위원에 초대대구은행장이 된 김준성(대구상의 기획분과위원장), 허병기(대구상의 의원), 이종화(대구상의 의원)를 선출했다.또 자본금은 수권자본 4억원,설립시 불입자본금 2억원, 발기인 출자는 7천5백만원(1인당 5백만원)으로 결정했다. 일반공모는 1억2천5백만원으로 정했으며 사무실은 당분간 당시 대구시중구동문동에 있던 대구상의 상황실을 이용토록 했다.
임시직원의 채용, 원시정관작성등 설립 내인가를 받기위한 준비작업이 그야말로 불철주야 강행돼2월24일에는 전국 3개지역중 최초로 내인가를 받았다.
내인가는 대구은행 설립에 박차를 가하는 계기가 됐을뿐 아니라 부산, 광주등 타지역 지방은행설립추진위원회에도 큰 용기를 주었다.
그러나 모든일이 순조롭게 풀려간것만은 아니었다. 내인가를 받은뒤 개점공약은 5월20일, 6월1일,7월1일, 8월10일, 9월20일, 10월5일등으로 계속 연기되다 당초 내인가 기간인 9월23일을 넘겨 10월7일에야 개점할수 있었다는 사실에서도 어려움은 쉽게 짐작할수있다.
내인가를 받은뒤 발기인이 인수할 주식 7만5천주와 일반공모할 12만5천주에대한 구체안을 수립했다. 그러나 주식모집 만료일인 4월30일까지의 실적은 부진하기 짝이 없었다. 일반공모의 경우 목표액의 10%%에도 미달했으며 발기인들의 실적 역시 저조했다.
주식모집기간을 1개월연장하고 준비위원들이 뙤약볕속을 돌아다녔으나 실적은 오르지않았다. 8월중순이 되도 불입금은 절반인 1억원을 넘어서지못했다. 일찍 주금을 납부한 사람들은 불입금 반환을 요구해오기도 했다.
이에 발기인회는 불입자본금을 당초 2억원에서 1억5천만원으로 하향조정했으며 발기인 1인당 인수한도를 5백만원에서 1천만원으로 증액했다. 이과정에서 주금을 한푼도 납입않은 발기인 한사람을 제명처분 결의하기도 했다.
주식공모가 예상과 달리 저조했던것은 주식회사에대한 인식이 부족했던데다 지방은행 장래를 비관적으로 본 사람들이 많았던 때문이다.
또 당시 시중은행 주식배당률이 정기예금금리의 절반밖에 되지않은데다 지역 주종인 직물업계의호응을 받지못한데 있었다.
그러나 이같은 어려움속에서도 내일의 지역경제를 이끌어 나갈 대구은행 설립의 꿈은 계속 무르익어갔다.
〈池國鉉기자〉
댓글 많은 뉴스
국힘 김상욱 "尹 탄핵 기각되면 죽을 때까지 단식"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민주 "이재명 암살 계획 제보…신변보호 요청 검토"
국회 목욕탕 TV 논쟁…권성동 "맨날 MBC만" vs 이광희 "내가 틀었다"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 전원일치 기각…즉시 업무 복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