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식(姜慶植) 신임 경제부총리는 시장경제를 신봉하는 안정론자로 통한다.
자유시장 경쟁원리를 존중하는 만큼 규제철폐와 시장개방에 대해서도 그의 입장은 단호하다.재무부장관 시절 우리 경제관료중 처음으로 수입자유화론을 들고 나왔으며 지난 93년에는 '국산품 애용식으로는 나라 망한다'라는 책도 펴냈다.
이 책에 대한 설명은 그의 경제철학이 어디에 바탕을 두고 있는지 분명히 보여준다.이같은 그의 경제철학은 관주도의 고도성장론이 지배했던 개발연대의 경제관료로서는 이단이라고할 수 있을 만큼 이례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그가 입안한 정책들은 그와 동시대인들의 반발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의 하나가 79년 경제기획원 차관보 시절 물가가 급등하고 부동산투기가 기승을부리자 김재익 기획국장과 함께 만든 '4·17 경제안정화시책'이다. 재정긴축과 가격자유화,중화학투자 조정 등을 골자로 한 이 시책은 우리경제가 관주도에서 민간주도로 넘어가는 분수령으로 평가되고 있다.
82년 이철희·장영자사건으로 재무부 차관에서 장관으로 승진한 그는 이른바'실명제 파동'으로또 한차례 큰 싸움을 벌였다. 이·장 사건의 수습을 위해 당시 김재익 경제수석과 금융실명제의전격 실시를 추진하다 민정당 의원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친 것. 이'사건'으로 그는'강경식(强硬式)'이란 달갑지 않은 별명을 얻으면서 자신의 의도가 무산되는 좌절을 겪기도 했다.83년 아웅산 사건 이후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발탁돼 관운을 타기도 했지만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비위를 거스르는 직언을 서슴지않아 1년이 못돼 중도하차하고 말았다.
85년 12월 민정당 전국구로 정치에 입문한 뒤 93년 박관용의원이 청와대비서실장에 임명되면서그의 지역구인 부산 동래구를 물려받아 같은해 보궐선거에서 당선됐다.
컴퓨터에도 일가견이 있어 72년 기획원 예산총괄과장 재직시 예산편성작업을 전산화했으며 지금도 현역의원 등 38명의 회원으로 구성된 '전자민주주의연구회'의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의정(議政)의 정보화를 주도하고 있다.
△경북 영주(62) △부산고·서울법대 △재무부 사무관 △경제기획원 차관보△재무부 차관, 장관△대통령비서실장 △12,14,15대 의원.
〈鄭敬勳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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