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년 개업과 더불어 '친절, 정확, 신속'을 행훈으로 정한 대구은행은 68년들어 행세확장에 본격착수, 개업 3개월만인 68년1월12일 최초의 지점인 서지점을 대구서문시장 입구에 개점했다.또 6개월만인 4월1일에는 1억5천만원의 증자를 완료, 자본금을 3억원으로 늘렸다. 창립 준비기간동안 주식모집에 난항을 거듭했던 대구은행이 이처럼 단시일내에 증자에 성공한 것은 지방은행이과연 문을 열수있을까하는 개업전의 불안심리가 해소된데다 지역은행으로의 성장 가능성이 엿보인 때문이다.
초창기 대구은행은 경영목표를 △내자동원에 기여하기 위한 저축증강체제확립 △환원금융체제확립과 신용창조의 다각화 △지역밀착화를 위한 소형점포의 확대 △지역개발을 위한 금융지원강화등으로 정했다.
이에따라 대구은행은 당시 서울본점 금융기관들로부터 소외받고 있던 지역시장공략에 본격 뛰어들어 68년6월에는 남·동지점, 10월에는 달성동·봉덕동예금취급소를 개점한다. 또 69년4월에는최초의 대구시외 점포인 포항지점이 문을 열었다.
이같은 점포망의 확충은 그간 제도권금융인 은행에 상당한 거리감을 느끼고있던 시민들에게 은행이용도를 높일수있는 계기가 됐으며 대구은행이 지역은행으로 뿌리내릴수 있는 밑거름이 됐다.특히 69년9월에는 지역민의 애향심에 호소하는 '대구의 돈은 대구은행으로'라는 캐치프레이즈를내걸면서 신설은행은 지역민의 뜨거운 성원을 받게된다.
구(舊)대구상의 건물의 좁은 셋방에서 출범한 대구은행은 70년8월15일 대구시 중구 남일동 구본점을 준공하게 된다. 이 건물은 85년5월28일 대구시수성구수성동 현본점으로 이전할때까지 15년간 대구은행의 사령탑역할을 수행했다.
대구은행 발전의 요람이 된 구본점은 바닥면적 1백38평, 지하1층 지상10층에 펜트하우스 3층을얹은 높이 50m의 매머드빌딩으로 번화가인 중앙로 네거리에 웅장한 모습으로 들어섰다.그러나 총공사비 2억1천만원이 투입된 공사는 설계및 건축과정에서 숱한 어려움을 겪었다. 당초바닥면적 90평에 7층으로 설계됐으나 한정된 예산을 가지고 최대한 잘 지어보려는 욕심에서 1백40평 7층, 1백40평 10층등 4차례나 설계를 변경했으며 지하2층은 과다한 공사비부담과 수압관계로 취소되고 말았다.
특히 부지가 협소한 관계로 램프로드의 설치가 불가능해 지하주차장을 설치하지못한것도 이 건물의 최대 약점으로 지적되고있다.
또 신축본점이 당초 예정일인 69년12월15일보다 약8개월정도 준공이 지체된것은 건축허가의 지연과 함께 당시 대구지역 토건업계의 기술수준이 낙후했다는데도 원인이 있다. 지상 25층짜리 아파트를 수백채씩 거뜬히 지어내는 요즘과는 달리 고층건물 건립경험이 많지않아 기술축적이 안된상태였기 때문이다.
이와함께 사무실난때문에 공사중 일부층에 본점영업부등 일부부서가 입주한것도 공사에 차질을줬으며 건물외부에 부착할 화강암 재료확보가 어려웠고, 이탈리아 '신데라'사의 엘리베이터 선적지연도 하나의 원인으로 작용했다.
대구은행은 70년4월 단순 상업은행의 차원을 넘어 지역사회개발에 직접 참여하는 투자기관의 역할을 수행하기위해 대구시와 함께 대구개발주식회사를 설립한다.
대구개발은 은행측이 3억4천5백만원, 대구시가 1억원을 출자해 설립됐으며 경부고속도로 대구진입로, 사과직매장, 동성로 지하도공사등을 맡아 건설하면서 지역은행으로 뿌리내리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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