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영욕함께한 문화공간 반세기

항상 굳게 닫혀있는 차가운 금속 문과 이를 지키고 있는 칙칙한 군복의 전경들. 대구미문화원(현대구아메리칸센터) 앞을 지나칠때면 누구나 쉽게 접하는 첫인상이다.

1980년대 민주화의 거센 물결속에서 반미시위 학생들의 화염병 세례를 당하는 수난을 겪어야했던이곳이 요즘 젊은이들에게는 그저 청산돼야할 미제국주의 잔재의 하나로 여겨진다면 너무 지나친말일까. 심지어 이런 곳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젊은이들도 있다는 한 대학교수의 말처럼 미문화원은 강산이 다섯번이나 바뀐 지난 반세기동안 너무도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다.춥고 배고픈 시절. '문화'라는 단어조차 생소한 그때 미문화원은 흘러간 팝송처럼 지금의 50~60대에게는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생활에 찌든 마음을 털어버리고 문학과 예술을 접하며 웃고노래할수 있는 대구의 유일한 '문화 출구'였기 때문이다.

미문화원이 처음 문을 연 것은 1948년 6월. 현 대구역 앞 2층 건물(북성로1가 82)에 미국정보문화센터라는 이름으로 자리를 잡았다. 식민지시절 일본식당으로 쓰인 이 건물은 천장이 낮아 어두컴컴했지만 1층은 당시 대구의 유일한 현대적 화랑으로 사랑을 받았다. 전시 공간이라고는 일부 다방의 빈약한 벽면이 전부인 시절이었다.

정점식, 강우문씨 등 지역 원로화가들뿐만 아니라 중고교 미술 교사들도 이곳에서 전시회를 열어언론으로부터 호평을 받기도 했다. 아더 맥타가트영남대 명예교수(전 대구미문화원장)는 "6.25사변이 터지자 서울 등지에서 대구로 피난온 예술가들이 미문화원에서 자주 전시회를 열었는데 화가 이중섭씨(1916~1956)도 그중의 한명"이라고 회고했다.

최상덕, 구상, 박영준, 정비석, 김동진씨 등 문인들과 테너 이장환, 피아니스트 김춘명, 이공주 씨등 음악가들의 발표회도 열렸다. 이곳에서 정기적으로 열린 음악감상회는 당시 양주동씨와 대구의 음악인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예육회(藝育會)와 양대 산맥을 이루며 지역 음악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문화적 혜택을 받지 못하는 오지(奧地) 사람들에게 미문화원의 이동 영화는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16㎜ 시사영화 '리버티 뉴스'는 마산 부근에 있었던 자체 영화제작소에서 국내외 뉴스로 직접제작, 한국정부에 대한 비판적인 내용까지도 비교적 객관적으로 전달했다고 한다.국내외 뉴스를 모은 타블로이드판 신문 '월드 뉴스'(총 12면)도 1948년부터 발행됐으며, 전시중에는 '자유의 종'이 제작돼 피난민들에게 배포됐다.

1966년 북성로에서 현재 경북대병원 맞은편 건물(삼덕동 2가 82)로 옮긴 미문화원은 1970년대에들어서면서 지식인과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활동을 더욱 강화한다. 미국의 학계, 경제계 인사 등을초청한 강연회가 활발해지고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하는 영어토론모임이 시작됐다. 이는 라디오,TV, 영화관 등의 보급으로 기존의 초보적인 문화활동의 필요성이 줄어든데 따른 것이었다.이에 대해 이성환 계명대 교수는 "미문화원 활동이 지식인층을 중심으로 바뀌면서 시민들과의 유대의식이 약화돼 결국 폐쇄에까지 이르게 됐다"고 평가하고 "일방적으로 미국의 정보와 지식을홍보하는 기능에 치우친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1980년대 민주화의 분위기속에 반미시위가 거세지자 국제공항에서나 볼수 있는 금속 탐지기와 경호용 방어 장치가 설치된다. 1983년 9월 22일 미문화원정문 폭발 사건으로 고교생이 숨지고 경비원이 다친 이후 경찰병력이 24시간 비상 경비근무를 서게 됐다. 1988년 대학생들의 사제 폭탄 투척사건 이후에는 도서관 이용자수도 급격히 줄어들었다.

이 와중에도 미문화원은 1991년 대구아메리칸센터로 이름을 바꾸고 미국의 입장과 외부소식을 알리는 정보지 '시사만평'을 대학생과 지식인들에게 2천부이상 정기 배포했다고 권화순 현 부원장은 전한다. 1950년 신태식 계명대 명예총장(당시 계성고 교장)을 1호로 시작된 '국제 초청자 프로그램'의 참가 범위도 교수 중심에서 노동운동가 등 사회 저변으로 확대, 미국에 대한 이해를 높였다. 이 프로그램 참가자는 매년 3~4명 정도로 개원이래 1백50여명이라는 적지 않은 인원이 미국을 방문했다.

클린턴 미행정부의 긴축정책으로 올해 공보처 예산이 25%%나 감축돼 결국 광주, 부산에 이어 대구미문화원도 8일 반세기의 역사를 마감한다. TV, 신문, 인터넷 등 미국에 대한 정보를 바로 얻을수 있는 다양한 통로가 발달된 것도 미문화원의 폐쇄를 재촉한 현실적 요인이었다.이제 우리의 시야에서 영원히 사라질 미문화원의 낡은 회색건물에는 낯선 주인이 들어서게 될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향수어린 '문화 공간'으로, 때로는 화염병 연기에 휩싸인 '반미의 표상'으로,가깝고도 멀게 느껴졌던 미문화원의 모습은 대구시민의 가슴속에 제각각의 의미로 영원히 남을것이다.

〈金英修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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