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경주남산-봄(1) 화마후의 남산

낮게 내려앉은 하늘. 며칠 계속된 봄비에 남산은 아직 젖어 있다. 옅은 구름사이로 언뜻언뜻 새어비치는 봄햇살에 4월 남산의 봄이 조금씩 드러난다. 계곡의 물소리, 새소리, 연초록빛 솔잎이 투명하게 남산을 감싸고 미풍에 마냥 흔들리는 들꽃의 고개짓이 상큼하다. 어디선가 조금씩 몰려오고 있는 봄기운에 수줍은듯 웅크리고 앉은 남산. 하지만 누천년 봄을 맞았던 왕릉도 석탑도 마애불도 이제는 봄의 기운을 느끼고, 이름없는 수많은 무덤도 벌써 봄이 와있음을 안다. 비 갠 후 대지에 드리운 부드러운 안개로 남산의 봄은 더욱 가깝다.

호르륵 호륵 호륵 호르륵··. 귓전을 간지르는 산새의 울음에 마음을 맡긴채 틈수골 천룡사터로오른다. 겨우내 언 땅도 조금씩 풀려 발길이 부드럽다. 얕은 계곡을 따라 난 산길이지만 녹녹찮은오름에 힘겹다. 얼마쯤 올랐을까 문득 적막감에 고개를 든다. 눈을 찌르는 키높은 노송군락. 뭔가기척이 있을것만같은 산중턱 풍경이다. 솔숲 모퉁이를 돌아드니 갑자기 너른 분지가 한눈에 다가선다. 바람에 서걱이는 마른 억새와 조금씩 물빛이 도는 대잎도 이제 겨울을 떠나왔다. 연풍에 옆으로 누웠다 일어서는 들꽃들. 살과 살을 마주대는 흔들거림이 달콤하다. 안개를 물리친 봄햇살이고요한 분지를 조금씩 흔든다. 산밑에 점처럼 앉아 있는 농가 한두채. 봄을 일구는 농부들의 소리가 아련하다. 밭고랑을 매다 농부는 오수가 깊었는지 쟁기랑 쇠스랑은 밭두렁에 누워있고 뿌리다만 석회가 밭고랑고랑마다 자기네끼리 하얗게 모여앉아 봄볕을 쬐고 있다.

발굴을 위해 곱게 빗질한 절터가 정연하다. 두번의 소실로 흔적만 남은 천룡사(天龍寺). 이 절이파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당(唐)사신 악붕구(樂鵬龜)의 예언이 새삼스럽다. 우뚝한 삼층석탑이 외로이 객을 맞는다. 단층기단에 3층탑신으로 된 통일신라시대의 탑. 탑신의 괴임대가 다소 작아지고 옥개석의 낙수면에 신라시대 특유의 경쾌함이 엿보인다. 90년이후 탑지주변의 발굴조사가 계속되고 있지만 아직도 곳곳에 초석과 연구(石展臼), 머리가 떨어진 귀부, 석등연화대석편등이 흩어져 있다. 절터 뒤로 바위들이 병풍처럼 서있다. 그 뒤로 남산 최고봉인 4백94m의 고위산. 키낮은 소나무에 몸을 의지하며 가파른 산길을 휘돌아 정상에 오른다. 이미 정상에는 햇살이 가득하고 안개대신 몸에 묻어나는 옅은 땀이 바람을 맞는다. 적멸보궁이 따로이던가. 부처의 마음이 되고 석가의 몸이 되면 그것이 적멸인 것을··.

용장골너머로 보이는 남산. 아! 아직도 남산의 봄은 멀다. 화마에 타내려 숯이 된 남산. 사철 푸르던 소나무는 검디검은 재가 되고 더러는 불길에 말라 노랗게 몸색을 바꿔 봄을 말없이 지켜보고있는듯하다. 재가 된 땅위로 피어오른 샛노란 노랑제비꽃 한송이. 끈질긴 생명력에 가슴마저 아려온다. 봄을 맞기위해 남산은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내야할까. 생명을 되찾는 봄까지 남산은 얼마나 얼굴을 바꾸어야 할까. 4월 불국정토의 남산은 아직도 봄이 힘겹다.

"경주 남산 뜬바위 아래 붉은 진달래가 피었다/진달래 피는 봄날은 운애가 자욱했다·/삼기팔괴(三奇八怪)의 이 부석은/가는 명주실을 양끝에 잡고/그 허리를 가로질러 나올 수 있다는 바위, 멀리서 보면 바위에 바위가 올라앉아/동쪽 토함을 바라보며 해맞이 달맞이를 하는/검바위 아래 진달래빛 붉새가/벌겋게 내려와 있었다" (정민호의 시 '부석아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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