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대구금융 100년-대구은행7

81년부터 83년까지 3년간은 돌발적 지준액 부족사태가 아니더라도 대구은행 창립이후 최대의 시련기로 분류된다. 창립이후 순항을 거듭하며 '앞서가던 은행'을 자랑하던 대구은행은 전국 금융기관 최고수준이었던 배당률을 낮추면서 본부기구의 축소, 점포신설억제등 감량경영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제2차 석유파동이 일어난 79년이후 지속된 불황으로 지역경제가 침체의 늪에 빠지면서 거래처의잇단 도산 등으로 부실채권과 미수이자가 급격히 늘어나고 예수금 신장세가 둔화됐기 때문이다.또 당시 급변한 금리변동도 은행경영에 막대한 차질을 초래했다. 80년1월 금리가 대폭 인상돼 69년이래 최고수준이 됐다. 즉 1년이상 정기예금을 기준으로 할 경우 예금금리는 종전보다 5.4%%포인트 높은 24%%, 일반대출금리는 5%%포인트 높은 25%%로 조정됐다.

금리조정으로 예대마진이 축소된데다 9개월후 불과 1년9개월동안 8차례에 걸쳐 정기예금금리가8%%까지 인하됐다. 이에따라 예금은 금리가 높았던 가입당시 금리가 계속 적용된 반면 대출금리는 당시 주류를 이뤘던 어음대출금리가 1년단위로 운용돼 개서과정에서 인하된 금리가 적용될 수밖에 없어 역금리현상으로 인한 수지 타격이 극심했다.

이와함께 83년 신설된 광명투자금융(현재 경일종합금융)등 제2금융권의 잇단 출범 및 규모확대로금융기관간 경쟁이 심화된 것도 경영악화의 요인으로 작용했다.

또 83년은 국내경제가 저물가기조의 정착과 높은 GNP성장(9.2%%)으로 긴 불황의 터널을 벗어났으나 지역경제는 주종인 섬유가 선진국의 수입규제로 여전히 침체국면을 벗어나지못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그해 11월4일에는 지역 대형건설업체인 광명그룹이 8백억원의 부채를 안은채 도산, 지역경제는 큰혼란에 빠져들었다.

광명 부도 여파로 83년 대구시내 금융기관 총예금고는 전년보다 16.5%%가 늘어났으나 전년증가율 24.3%%에는 크게 못미치는 저조한 성장을 기록했다.

한편 이같은 어려움이 예고된 81년2월 대구은행은 제24기 주총을 개최, 대대적 경영진 개편을 단행하게된다.

제3대 행장에는 정용달전무가, 전무에는 권태학상무가 각각 취임했으며 김용기기획조사부장(현경북상호신용금고사장), 이상경서울지점장(현 대구신용보증조합이사장)등이 새로운 이사로 선임됐다.

또 경영진 교체직후인 81년3월24일에는 현재 본점인 대구시수성구수성동 대구농고부지에서 본점신축공사 상량식을 가졌다. 철피복공사와 방수공사등을 주내용으로 하는 2차공사는 83년4월에 끝낼 예정이었고 이보다 1년 앞선 82년4월에는 골조공사가 완료됐다.

그러나 2차공사를 끝으로 공사는 중단됐다. 동시에 시중에 본점매각설이 유포되기 시작했다. 또다시 시련이 닥친것이었다.

〈池國鉉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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