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中, 보수파 원로 하나둘 사라져

팽진(彭眞)의 사망은 지난 2월 등소평(鄧小平)의 사망과 함께 중국의 원로들이 하나하나 사라져가고 있음을 의미하고 있다.

팽은 지난 3월초에도 북경의 인민해방군총의원(301병원)에서 사망했다는 설이 강력히 나돌았었다.등의 장례식에는 팽이 장례위원서열 5위였으나 화장식과 추도대회에 모습을 보이지 않아 중병으로 입원했음을 강력히 뒷받침했었다. 20대초, 공산당에 입당한 팽은 모택동(毛澤東)을 도와 중국혁명과 신중국의 기틀을 다진 노1대 무산계급혁명가로 꼽혀왔고, 혁명시절 섬서, 하북, 내몽고지역에서 혁명운동을 지원했다. 유소기(劉少奇)전국가주석과 막역한 사이로 문화대혁명의 정치운동화를 반대하다가 숙청대상 1호로 낙인찍혀 쫓겨나는등 핍박을 받았다. 강청(江靑)등 4인방몰락후인 79년, 정치국위원으로 복귀돼 권력핵심에 진입한 팽은 80년부터 엽검영(葉劍英)원수와 함께 헌법개정위원회를 주도했다. 80년초 중반에는 전인대(全人大)위원장, 정법위(政法委)서기등을 겸임하며 개혁개방초기의 법률제정등 정법계와 전인대를 실질적으로 장악, 중국법치주의의 기틀마련과등소평의 1인전제에 대한 견제역할은 그의 공로로 평가되고 있다. 지난 87년 공산당 13차대회에서 등에 의해 다른 원로들과 함께 현직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은퇴후에도 최근까지 각종 정책문제에 대해 영향력행사 및 의견제시 등으로 등을 제외한 가장 영향력있는 원로로 꼽혀왔다. 그는반면 급진자주의적인 호요방(胡耀邦), 조자양(趙紫陽) 전총서기의 실각에 영향력을 발휘했으며 6.4사건에도 강경진압을 지지하는 보수적 견해를 유지해왔다.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사범학교졸업후 한때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던 팽진은 50년대부터 일찍 권력의 핵심부에 진입했었으나 자기파벌을 형성하지 못했었다. 팽의 사망으로 중국원로그룹에는 양상곤(楊尙昆.91), 송임궁(宋任窮.91), 부일파(簿一波.90), 만리(萬里.82), 송평(宋平.81)등만이 남게 됐다.〈북경.田東珪특파원〉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