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정치인들 아직 정신 못 차렸다

16일 낮 12시 대구시 수성구 뉴영남 호텔.

신한국당 박찬종(朴燦鍾) 고문이 당소속 경북도의원들을 초청, 점심을 같이 하고 있었다. 7월 전당대회를 앞두고 당연직 대의원인 도의원들을 상대로 선거운동을 펴는 자리였다.같은 장소 오후 4시. 국민회의 김상현(金相賢) 지도위의장이 얼굴을 드러냈다. 19일 전당대회에서총재직 경선후보로 나선 김의장이 대구지역 대의원들과 만나는 득표모임이었다.박고문의 오찬 겸 간담회에서는 2만원짜리 도시락이 나왔다. 김의장은 이른 저녁으로 양식을 내놓았다.

'고비용 정치구조'에 대한 국민적 혐오가 극에 달한 요즘이다. 92년 대선자금을 놓고 벌어지고 있는 여야간 진흙탕 싸움으로 깨끗한 정치를 향한 염원이 더욱 절실한 때이기도 하다.특히 올 연말 선출되는 대통령만은 선거자금이라는 원죄를 갖게 해서는 안된다는 자각 아래 정치권 일각에서 여러 방안이 논의되고 있는 시점이다.

그러나 정치인들의 해묵은 관행은 크게 고쳐지지 않았다. 박고문과 김의장의 대구 행보는 이를대표적으로 보여주었다.

박고문은 16~17일 이틀간 대구를 누볐다. 16일 도의원 24명과 간담회를 가진 뒤 저녁에는 신한국당 대구지부 당직자 40여명을 만났다. 17일에는 역시 호텔에서 기자회견을 했다.박고문은 그러나 활발한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경비를 거의 들이지 않았다.

2백26만원이 나온 도의원 간담회는 포항출신 ㄱ도의원이 부담했다. 간담회에서 사회를 본 박고문보좌역이 "ㄱ의원이 점심값을 내겠다고 하는데 고맙다"고 밝혔는데, 정작 당사자인 ㄱ의원은 간담회가 끝난 뒤 "사전 협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점심을 낸다고 말할 수 있느냐"고 불만스레 말했다.ㄱ의원은 결국 계산을 치렀다.

저녁 모임은 원래 신한국당 대구지부가 오래전 준비한 것이어서 역시 박고문의 부담은 없었다.박고문은 "대구 지구당 위원장들과 조만간 만날 계획이었는데 이날 때마침 모임이 있다고 해서왔다. 오비이락 격이 됐다"고 말했지만, 대구지부 사무처에서는 "남의 잔치 불청객과 다름없다"는반응이었다.

'경비 떠넘기기'라는 정치인들의 오랜 관행중 하나를 이날 박고문은 잘 보여주었다는 얘기다.박고문은 대신 자신의 저서 두 권을 도의원들에게 그냥 기증했다.

김의장의 이른 저녁 행사에서도 2백만원이 넘는 경비가 나왔다. 김의장이 당권을 위해 얼마를 지출하는지 정확히 알기 어렵지만 전국을 순회하고 있는만큼 만만찮은 부담인 것만은 분명하다.이들의 행사가 그렇게 사치스런 것은 아니었다. 호텔이 다른 어떤 곳보다 행사하기에 편리한 것은 사실이며, 참석자들이 호텔행사를 은연중 바라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박고문은 도의원들과의 간담회에서 '돈 안드는 선거'를 여러 차례 강조했다. 대규모 군중집회, 플래카드 같은 선전물을 줄여야 돈 안드는 선거가 될 것이라고 구체적인 방법을 예시하기도 했다.그러나 속내를 들여다보면 멀었다는 게 대체적인 평가였다. '깨끗한 선거'는 아직은 입에만 올려지는 수준이다. 〈李相勳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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