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전설적인 검객 미야모도 무사시가 남긴 병법서에는 눈 동작에 대한 흥미로운 언급이 있다. 그에 따르면 관(觀)은 눈을 세게 하여 먼 곳을 살피는 것이고 견(見)은 눈을 약하게 하여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의 움직임을 살피는 것이다. 관은 시야의 사각지대를 없애는 데, 견은 진짜 동작과 가짜 동작을 구분하여 살피는 데 필요한 것이라 한다.
나는 여기서 눈을 강하게 한다거나 약하게 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말인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미야모도 같은 검객의 눈에는 세상 모든 존재가 적이거나 적 아닌 것으로, 모든움직임은 해치려는 것이거나 해치지 않으려는 것으로만 비치리라는 것이다.
칼없는 무사들의 눈 동작
세상살이를 칼 없는 싸움, 총 없는 전쟁이라고 부르는 것은 흔히 듣는 메타포다. 이 말은 상투적이고 진부한 만큼이나 절대다수가 바라보는 세상의 속성을 정확히 증언해 주는 셈이다. 목숨의생사, 싸움의 승패, 힘의 강약으로 세상살이를 파악하는 것은 이제 칼을 든 검객들만이 아니다.길거리를 오가는 저 선남선녀가 다 그러한 눈길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모든 움직임은손해되거나 이득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득실의 원근법은 세상을 바라보는 이 칼없는 무사들의눈동작이다. 그래서 우리는 풀 한 포기 돌멩이 하나 바라보는 눈길에서조차 이 병법의 원칙에 속수무책으로 묶여 있는 것이다.
물론 삶의 게임에서 승자가 되는 것만이 목표라면 미야모도의 병법은 탁월한 처방일 수 있으리라. 관으로 먼 곳을 헤아리고 견으로 가까운 것의 살핌에 실수가 없으면 불패의 신화를 만들어갈 수도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기고 지는 것만이 살아가는 일에서 유일하게 중요한 일은 아니다. 다른 중대사들도 있으니 가령 이렇게 살아 남으려 발버둥치는 이 세상이 참으로 있는가 거짓으로 있는가, 인간은 사랑없이 살 수 있는가 같은 문제들이다.
자유로운 눈길 되찾아야
플라톤의 이데아에는 싸움에 이기기 위한 병법적 의미는 전혀 깃들여 있지 않다. 대신 무엇이 진짜인지를 판정하는 눈을 위한 풍부한 암시가 스며있다. 결국 이데아는 우리가 온갖 욕망으로 굴절되어 버린 시선의 원근법을 단호하게 넘어서서 세상의 모든 것들을 그 자체로 바라보게 될 때,그때 보이는 세상 모습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의 눈이 곧 그 사람의 세상이다. 이전투구의 싸움판에 말려들지 않고 살아감의 기쁨을 누리려 한다면 먼저 칼을 버리고 그 살기어린 눈동작을 멈추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우리가 오랫동안 내팽개쳐 왔던 시선의 문법, 즉 꿈꾸는 듯한 사랑의 눈길이나 경쾌하게 사물의 표면을 미끄러지는 자유로운 눈길부터 되찾아야 한다.
〈부산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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