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년은 대구은행 창립 30주년의 해. 장년은행으로 성장하려는 대구은행은 개방화와 자율화, 최악의 경기침체라는 파고와 직면했다.
연초부터 금융개혁을 둘러싼 태풍권에 들어섰다. 은행간 합병시나리오가 학계와 연구기관에서 쏟아졌다. 대구은행은 금융개혁 전담조직을 설치, 합병에 대비한 장단기전략을 수립하는 한편 당면과제를 모색하고 분위기를 일신하기 위해 3월 경주에서 'TOP97경영층 워크숍'을 열었다.97년에는 개정은행법 발효에 따라 은행 비상임이사 제도가 도입됐다. 대구은행은 2월27일 제40기정기주총에서 8명의 비상임이사를 새로 선임했다. 비상임이사는 은행장 추천, 거액여신 심사 등경영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게 됐다.
계약직 이사대우제가 처음 도입되면서 김재득 종합기획부장과 조승웅인사부장이 이사대우로 선임됐다. 이들의 발탁으로 대구은행 30년사에 처음으로 공채출신 임원 시대가 열렸다.경영위험의 종합적인 관리를 위한 종합리스크관리체제를 4월 구축했으며, 같은달에는 국채보상운동 90주년 사업의 일환으로 지역경제를 살리자는 '지역경제도우미통장'을 시판했다. 전국 10개 지방은행 어디서나 하나의 통장으로 자유로운 입출금 거래를 할수있는 '뱅크라인'통장을 6월중순시판한 것도 주목할만한 상품.
이해 대구은행은 7월중 9백60억원의 유상증자를 단행, 자본금을 종전 2천2백5억원에서 3천1백65억원으로 늘리기로 결의했다.
68년 9월말 5개에 불과했던 대구은행 점포는 30년이 지난 현재 2백5개로 늘어났다. 3백명 수준이던 임직원수도 12배나 늘어난 3천6백명을 헤아린다. 18억원 남짓했던 총자산 규모도 확대일로를거듭, 97년3월 12조원에 육박하고 있다. 97년에는 지방은행 최초로 수신고 10조원을 달성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국내은행을 통틀어 11번째 10조원 고지 달성이다.
'대구의 돈은 대구은행으로'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67년 설립된 대구은행. 오늘날의 대구은행이 있기까지는 지역민의 전폭적인 사랑과 은행임직원의 땀이 있었다.
장년은행이 된 대구은행은 '전국 은행화'와 '국제은행으로의 진출'이라는 과제를 안고있다. 앞으로 금융개혁의 파고를 넘고 지역 금융의 중추적 역할을 계속해 나가도록 지역민이 관심을 갖고지켜볼 일이다.
〈金海鎔기자〉
댓글 많은 뉴스
구미 '탄반 집회' 뜨거운 열기…전한길 "민주당, 삼족 멸할 범죄 저질러"
尹 대통령 탄핵재판 핵심축 무너져…탄핵 각하 주장 설득력 얻어
계명대에서도 울려펴진 '탄핵 반대' 목소리…"국가 존립 위기 맞았다"
이낙연 "'줄탄핵·줄기각' 이재명 책임…민주당 사과없이 뭉개는 것 문화돼"
尹 대통령 탄핵 심판 선고 임박…여의도 가득 메운 '탄핵 반대' 목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