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회창 신한국 대선후보 걸어온 길

신한국당 대선후보로 선출된 이회창후보는 대쪽판사로 알려진 만큼 원칙과 소신에 걸맞은 행보를걸어왔다. 물론 정치판의 혼탁상을 반영하는 대선후보 경선과정에서 다소간 흠집이 없었던 것은아니지만 그의 대쪽 소신과 법대로의 이미지는 항상 그를 주목하게 했다. 지난 총선때는 그의 이같은 이미지와 대중성을 확보하기 위해 여야 모두가 치열한 경쟁을 벌이기도 했을 정도다.그의 이같은 이미지는 검사인 부친과 가톨릭집안이라는 가족사에서 생래적으로 습득된 것으로 반평생 육법전서를 통해 사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던 법관으로서의 생활을 바탕으로 자연스럽게형성됐다.

그는 1935년 6월2일 황해도 서흥에서 부친 이홍규옹(93)과 모친 김사순여사(86)의 4남1녀중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출생지는 황해도이지만 집안은 16대 조부가 충남 예산으로 내려온 후 그곳에서대대로 살아 뿌리로 치면 충청도 사람이다.

본가는 부친대부터 당대까지 2대에 박사만 7명이며 부친과 아들 4형제 모두 경기고, 서울대 동문이다.

그의 유년은 전남 담양군 창평면 외가에서 보냈는데, 외가는 담양의 천석꾼 집안으로 외삼촌 3명은 모두 이 지역 국회의원을 지냈다. 광주서석초등학교, 광주서중, 청주중, 경기중, 경기고로 이어지는 그의 유학은 아버지의 전근이 원인이다.

경기고를 거쳐 서울대 법대에 입학한 그는 대학 4학년때인 56년 고시사법과에 합격, 공군 법무관으로 3년간 복무한 후 대위로 제대했다. 그리고 4.19혁명이 일어나기 직전인 60년 3월 서울지법인천지원 판사로 임명됐다. 이어 그는 서울지법 판사, 서울고법 판사, 서울민사지법 부장판사, 서울고법 부장판사, 법원행정처 기조실장을 거쳐 81년 46세의 나이로 최연소 대법원 판사에 임명됐다.

대쪽이란 별명을 얻게 된 것도 대법원에 근무하는 동안 그가 소수의견자라는 별명을 얻게 된 때부터이다. 그는 군사정권 시절에도 수사기관의 무리한 영장청구를 기각하는등 불의와는 절대 타협하지 않는 면모를 보인 것이다.

또 89년 중앙선관위원장으로 재직할 당시 동해 보궐선거에서 불법 타락선거를 경고한 일은 그의대쪽이미지를 더욱 부각시키는 계기가 됐다. 이해 4월 동해시 재선거에서 당선된 홍희표당선자등 4당후보 전원을 고발한데 이어 불법선거를 문제삼아 1노3김에게 모두 경고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이보다 더 그를 화제의 대상으로 올렸던 사건은 그의 감사원장 재직당시다. 김영삼정부가 들어선후 93년에 감사원장에 임명된 그는 그동안 성역으로 인정돼 온 청와대비서실과 안기부까지 감사대상으로 올릴 정도였던 것이다. 이때문에 그는 감사원장에서 국무총리로 임명돼 현정부가 그를거세하기위해 총리로 임명했다는 설이 돌기도 했다.

그의 대쪽 소신과 원칙주의는 이에 그치지 않았다. 총리로 임명된 후에도 통일안보회의에서 논의된 내용도 총리 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해 김대통령과 마찰을 겪기도 했다.그가 결국 신한국당에 영입돼 사상 처음으로 치러진 대선후보 경선에서 대통령후보로까지 당선된것은 그의 이같은 일관된 소신과 원칙이 바탕이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李相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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