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폐교 예술인촌

대구시 동구 평광초등학교. 4년전만 해도 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이고 학교종이 신나게 땡땡땡 울리던 곳이었다. 복숭아꽃에 넋을 잃고 측백나무숲을 지나 꼬불꼬불 시멘트길을 오가던 조잘쟁이학생들은 94년 3월1일부로 6km밖 해서초등학교로 흡수됐다. 폐교. 아이들이 흙먼지를 일으키던운동장엔 잡초가 뿌리를 내렸다.

95년 겨울. 이상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잡풀을 뽑고, 발자국 선명하던 벽에는 빨갛고 노란 꽃이며 해와 달을 그려넣었다. 국기게양대 옆 옛 창고자리 앞에는 새 깃발이 올랐다. '조각왕국'.칠판과 급훈이 걸려있던 자리는 하얗게 다시 칠해져 빼곡이 캔버스가 들어차더니 이듬해 2월 학교정문에는 '평광현대미술원'이란 간판이 나붙었다.

교장실, 교무실, 5개의 교실이 있던 자리에 20여명의 미술가들이 모여 작업을 한다. 경북대 예술대학 교수, 졸업생, 재학생들이다. 소사들이 기거하던 초가에 아예 눌러앉은 사람도 서넛쯤 된다."현 미술원장인 이동진 교수님이 주축이 돼 새로운 문화공간을 마련해보자는 취지로 모여들었죠. 시내보다 비교적 싼값에 작업실을 얻을 수 있고 미술대전에 공동출품도 할 수 있어 좋군요"사람좋아 보이는 김부연씨(31)도 2년전 언 손을 녹여가며 폐교단장을 거들었었다. 좁긴 하지만 운좋게 교장실을 꿰찬 그는 1년에 70만원 가량 임대료를 내고 평광에 정착해 한국화를 그린다. "비록 폐교가 됐지만 평광동 주민치고 학교 담벼락에 돌맹이 하나 거들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이곳 사람들에게는 소중한 추억이 서린 곳입니다"

그의 말대로 평광현대미술원은 예술촌의 분위기와 옛 학교의 정취가 어울려 묘한 감상을 품게 한다. 초등학교답게 흐드러진 무궁화가, 뒤틀리고 과장된 현대조각품들과 운동장에 나란히 서있다.조각왕국 앞에는 언젠가 5학년이었을 '최명현, 하정숙'이가 같이 쓰던 2인용 책상이 넙죽 엎드려 있다. 실내화주머니를 걸었던 책상 옆구리는 비어있지만 짝궁끼리 쟁탈전을 벌였던 책상 윗자리에 이제는 작업용 톱과 망치가 놓여있다. 미술원을 찾는 사람들은 덤으로 '추억'을 구경하고가는 셈이다.

그래서 평광 사람들은 굳이 허물어 다시 쌓으려고 하지 않는다. 아직도 게양대에는 태극기가 펄럭이고 아이들은 미끄럼틀을 찾아온다. 일요일이면 동네사람들과 족구시합을 벌인다. 뒤켠 텃밭에상추며 풋고추, 방울토마토가 익을 때면 삼겹살 인심이 넉넉하다.

밀양시 산내면에 있는 가인초등학교도 지난 93년 폐교조치됐다. 한때 사설학원으로, 주정뱅이들의은신처로 쓰였던 폐교의 어두운 이미지를 벗고 다음달 1일이면 역시 '가인 예술촌'이란 문화공간으로 거듭난다. 개관을 나흘 앞두고 찾아간 가인예술촌은 청소에, 개관기념 한일 미술교류전 준비에 정신이 없는 모습이었다. 화가들도 못과 망치를 들고, 동장과 시청직원들은 팔을 걷고 쓰레기줍기에 나섰다.

"가인예술촌은 모든 사람들의 요구와 맞아떨어져 생긴 곳입니다. 주민들은 호젓함을 방해받지않고 학생들은 여전히 배움의 터를 간직하게 됐죠. 그뿐입니까. 미술가들은 작업장을 얻었고 밀양시는 새로운 문화명소를 얻었죠" 개관준비에 여념이 없는 박장길씨(44.서양화가)는 예술촌 자랑이 대단하다. "밀양시와 주민들의 전폭적인 지지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대구 평광현대미술원 입주자들이 매년 9백여만원의 임대료를 내고 있는 것과 달리 밀양시는 2천5백평 학교부지를 무상으로 제공하고 8천여만원의 예산을 별도로 지원했다. 주민들은 돼지를 잡아 잔치를벌였다. 앞으로 가인예술촌은 작업실로, 전시장으로, 시민문화강좌가 열리는 문화교실로 쓰이게된다.

그외에도 안동시 서후면에 있는 송강초등학교가 95년 폐교 후 '솔밤작가촌'으로 거듭났고 전북임실의 오궁초등학교도 '전북미술문화센터'라는 이름의 집단 창작촌으로 변모했다. 하루가 멀다하고 농촌에는 폐교가 생기고 있지만 그 넉넉함에 걸맞은 소박한 문화공간으로 일궈내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하물며 대구 중앙초등학교처럼 도심에 위치한 곳은 개발논리에 부딪혀 무작정방치되고만 있다. 여관과 식당, 위락시설이 뿜어내는 칙칙한 도시공해. 어린 시절 풋풋한 추억이함께 묻어나는 예술의 향기. 어느 것을 택할 것인가는 우리의 몫이다.

〈申靑植 기자〉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