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영민의 세상읽기

"배움의 길, 통일의 길"

무릇 모든 배움의 처음은 자신을 열어보이는 것이다. 빗장을 풀지 않고서는 손님을 맞을 수 없는법. 스스로 만족한 채 자폐(自閉)하는 순간부터 배움은 파산한다. 자기의 온존만을 완상(玩賞)하는개체란 거울 앞에 누운 미라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배움의 계기는 늘 새로운 만남이며, 그긴장이고, 자기동일성의 의심이다. 요컨대 베움은 자신을 흔드는 일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흔들어서 자신을 점검하고, 그 틈으로 남을 만나고, 만남이 주는 차이와 그 긴장을 슬기롭게 견디고,그 견딤이 매개하는 성숙과 변화의 경지를 체득해가는 것-바로 그것이다.

일없이 자신의 문을 열고 터를 흔드는 것이 아니라, 열고 흔들지 않고서는 건강한 삶이 가능하지않기 때문이다. 물음이 없는 삶에 찾아오는 부패를 연상해보라. 배움이 곧 물음이고, 물음으로써그 생명력과 탄생이 유지되며, 물음으로써 새로운 전망을 키운다는 원칙은 비단 교실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만남과 배움은 통일의 준비와 관련된 것이리라. 한 쪽에서는 식민지의재난과 조급한 근대화로 인한 과거와 현재 사이의 절맥(絶脈)이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면, 다른 한쪽에서는 분단의 심화와 그 파행으로 인한 남북한 민족사이의 절맥이 우리를 위난으로 내몰고 있다. 혹자들의 진단처럼, 근대적 위험사회와 분단사회의 민족모순이 중첩되어 있는 것이다. 이 절맥의 상처를 배움의 지혜로써 극복할수는 없을까.

비유하자면, 우리의 현대사는 긴 만남과 아픈 배움의 과정에 다름아니다. 파행적 근대의 질곡으로인해 잃어버린 과거를 다시 만나고 배우는 과정이요, 남북으로 잃어버린 민족이 그 이질화된 현실을 깨고 다시 만나며 서로를 배워나가는 과정에 다름 아닌 것이다. 우리의 기대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완고한 전쟁 사회주의체제를 고수해오던 북한도 남한의 체제를 배우고 있다. 자본주의에대한 이념적 우월성·정당성을 국가형성의 시금석으로 쳤던 북한이 고육지책으로 설치한 '경제특구'가 무엇을 뜻하겠는가. 그것은 바로 "자신의 문을 열고 남을 만나지 않고서는 건강한 삶이 가능하지 않다"는 배움의 기본이 아니겠는가.

비무장지대의 무력충돌 사건이 불과 얼마 전인데, 오늘은 분단 이후 최초로 남북한 사이에 민간전화가 개통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온다. 북한 식량난을 두고 동포애를 강조하는 음성이 난무하는가 하더니, '박찬호의 나라'에서는 인터넷 사이트의 국가별 항목에 박찬호가 북한선수로 등록되어있다고 항의하면서 "즉각 시정할 것을 공개적으로 촉구"하는 소리가 드세다. 황장엽의 기자회견에대한 보복테러의 위협도 며칠을 넘기지 못하는 짧은 소식이 되고 말았고, 어느덧 주변에서는 4자회담에 대한 섣부른 기대가 읽힌다.

북한체제의 변화에 대한 갖가지 담론들이 무성한 가운데, 바야흐로 경직된 냉전이데올로기와 반공주의의 껍질을 조금씩 벗고 있는 대다수의 국민들은 적(敵)과 동족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대북관(對北觀)으로 여전히 갈팡질팡하고 있다. 정작 차분한 '북한 배우기'가 이루어져야 할 때다. 민족의 창조적 재결합과 남한 자본주의의 자기혁신을 위해서 남한의 민족주의가 자본주의를 넘어사회주의적 요소를 포용해내는 문제까지를 포함해서 말이다. 북의 형제들에게 일방적으로 우리를배우라고 강요하는 순간, 우리는 곪기 시작할 것이다. 바로 이것이 배움의 묘(妙)인 것이다. 개인이든, 민족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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