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왕주의 철학에세이

"이렇게 살자구요" 성격의 변화는 사람의 한살이에서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왜 그것이 한결같이 영악스러워지고 뻔뻔스러워지는 방향으로만 가닥이 잡히는가. 순수함은 때묻음으로 헌신은 몸사림으로 몰입은 방관으로 변해가는 것들은 마치 키가 위로 자라고 몸피는 옆으로 불어나는 것처럼 자연스럽기만한 일이가. 그렇다면 몸이 커지는 것을 성장이라고 부르듯 성격의 그러한 변화에 대해서도 성숙이라고 불러 마땅히 그 분별력과 지혜를 높이 평가해야 하지 않나.

뻔뻔·추악함의 무한질주

이것은 확실히 풀기 어려운 윤리학의 난제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이에대한 답이 어떤 식으로 내려지든 저 예민하고 순수한 감정, 부끄러움이 마치 철판이라도 깐것같은 뻔뻔함으로 바뀌는 변화에 대해서만은 어떠한 정당화의 논리도 나는 분연히 거부할 참이다. 그것은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 먼저 아름다움과 추함의 문제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나는 가끔 미래 언젠가 나의 현실로 다가올 노추를 생각하며 우울한 심기에 빠져들곤 한다. 짐작컨대 그때의 나는 지금보다 덜 부끄러워하는 대신 더 뻔뻔스러워지고 더 노회해져서 추악해져 있으리라. 돌이켜보건대 어렸을 때 나는 유난히 부끄러움이 많았다. 초등학교 시절에 어느 상급학년선생님에게 서류 한장 전해드리라는 담임 선생님의 심부름을 오직 부끄러움 때문에 그 교실로 들어서지 못해 오전 나절을 문밖에서 서성이며 보낸 적도 있다. 그러던 내가 지금은 수백명 앞에서의 대중강연을 이 닦는 일상사처럼 해치우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제 나도 어지간히 후안무치해진 셈이다. 이처럼 내 낯이 두꺼워지면서 어쨌든 부끄러움도 사라져갔지만 지금 회상해보니 그토록 부끄러움이 많았던 그 시절이야말로 내가 살았던 가장 아름다운 세월이 아니었나 생각된다.시대정신이라는 것이 있다면 시대감정이라는 것도 있으리라. 그렇다면 우리의 시대감정은 무엇인가. 그것은 부끄러움 없는 뻔뻔함이라고 해야할 것 같다. 요란법석한 미인대회나 TV의 무슨 짝짓기 프로그램등을 보면 뻔뻔함이 오히려 새롭게 각광받는 새시대의 미덕처럼 비치기도 한다. 이전시대의 잣대로 잰다면 내가 일등 미인이 아니냐고 대놓고 다투거나, 남자가 여자를 여자가 남자를 만인의 시선 속에서 공개적으로 찾는 일자체가 후안무치한 일에 속했다. 더구나 허풍섞인 자기자랑의 언사로 자신이 마땅히 선택받아야 할 고가의 상품이라고 선전하는 모습들에 이르면 맹자가 선한 본성을 이루는 한가지 증거로서 인간이 타고났다는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과연 선천적인 것인지에 대해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진정한 아름다움의 비밀

서양 지혜는 이 '부끄러워하는 마음'에 대해 선악의 도덕적 차원이 아니라 아름다움과 추함의 미학적 차원으로 접근한다. 희랍신화에 따르면 진정한 아름다움의 비밀은 부끄러움에 있다. 희랍의여신들 가운데서도 아름답기로 소문난 세 여신 헤라, 아테네, 아프로디테 중에서 아프로디테가 천상 천하에서 가장 아름다운 존재로 판정받고 에리스의 황금사과를 받게 되는 것은 단 한가지 이유, 즉 아프로디테의 허리에 둘러진 부끄러움의 띠 게스토스 때문이었다.

이 신화의 논리대로라면 결국 시대가 이토록 추악해진 것은 우리 모두가 이 게스토스를 잃어버린까닭이다. 오늘날 우리사회에서 자행되는 저 숱한 비리, 오작 스캔들, 끔찍한 범죄들도 모두 이부끄러움에 대한 첨예한 감각들을 잃어버린 데서 생겨나는 비극들이 아니던가. 부끄러움을 가르쳐드립니다. 이 지경에 이른 시대의 추악함이 오죽했으면 작가 박완서가 소설로써 그것을 가르쳐주고자 했겠는가. 이제 되찾아야할 것은 피서지에서 잃어버린 현금지갑이 아니라 부끄러운 일에부끄러워 할 줄 아는 저 순수의 마음이다.

〈부산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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