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오키나와의 해변에는 휴가철을 맞아 각지에서 몰려든 피서객들로 젊음이 넘치고 있다. 에메랄드 블루의 맑은 바다는 화려한 리조트 시설과함께 어우러져 지상 낙원의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그러나 52년전 오키나와섬은 전역이 피비린내 나는 전쟁에 휩싸여 있었다.오키나와에서는 해마다 6월23일을 1945년 당시 전쟁으로 목숨을잃은 영혼들을 위로하는 '위령의날'로 정하고 있다. 올해도 평화기념공원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추모제를 올렸다.이곳에 있는 '평화의 초석'에는 전쟁 희생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현재 그 숫자는 23만6천6백60명. 오키나와 전쟁에서 죽은 사람이 그만큼이나 된다는 말이다. 그중 일본측 희생자는 약 18만8천여명. 미군측이 1만2천여명이다. 그런데 일본측 희생자가운데 본토 출신 군인은 6만5천9백여명뿐이고 나머지 12만2천여명은 오키나와 출신이다. 또 그중 9만4천명은 어린이와 부녀자를 포함한일반주민이었다. 전투가 특히 치열했던 남부해안 지역에 지금도 남아있는 빈집터들은 폭격이나자폭 등으로 온가족이 몰사한 집터이다.
일본군은 옥쇄(玉碎)라는 미명하에 군인뿐만 아니라 일반주민들에게도 자결을 강요했다. 미군포위망 속에 들어간 병사의 자결, 부상병의 자결,특히 주민들의 일가족 집단자결의 참상은 지옥도(地獄圖)바로 그것이었다고 전쟁사는 기록하고 있다.
도카시키지마(渡嘉敷島)의 경우에도 45년3월28일 일본군의 지시에 따라 주민들은 집단자결을했다. 수류탄.면도날 등으로 자결한 사람은 3백29명에 달했다. 이섬에서 죽은 주민들의 58%%가집단자살한 사람들이었다. 자마미지마(座間味島)에서는 미군이 상륙하기 직전 노인과 어린이를포함한 전주민은 충혼탑앞에 집합해 전원 자결하라는 일본군의 명령이 있었다.자신의 가족들을 죽이고 폭격으로 불붙은 숲속으로 뛰어드는 사람, 바위에 머리를 치는 사람,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사람 등등 생존자의 증언은 상상을 초월하는 참극이었다고 한다.극도의 공포와 절망감속에 빠진 주민들은 미군을 귀축미영(鬼蓄美英)의 군대라며 선전하고 '충군애국'을 세뇌시킨 일제의 명령에 따라 차례로 전쟁의 희생자가 됐다. 이러한 주민들의 집단자결은 오키나와 전쟁이 보여준 특징중의 하나로 일본군부가 본토사수의 결심을 과시하기 위해 이러한 참상을 몰고왔다는 주장도 있다. 대본영(일본군총사령부)은 오키나와에 대한 일체의 보급도 없이 군대와 주민이 함께 섬을 사수토록 지시했었다.
일본군에 의한 주민학살사례도 적지 않다. 주로 미군 스파이라는 혐의로 가족들을 몰살시킨 기록도 있고 군인들과 함께 동굴로 숨어든 주민들중에 밖으로 나가는 사람들을 첩자로 보고 살해함에따라 전쟁이 끝난 8월15일 이후에도 구출되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다.
지금도 오키나와 각지에서는 당시 희생된 사람들의 유골발굴 작업이 계속되고 있다. 또한 당시의격전지는 전쟁 유적지로 개발돼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들고 있다.
군인 사망자보다 일반주민의 희생자가 훨씬 많았던 오키나와의 슬픈 전쟁은 일제의 만행을 증언하는 한편 전쟁의 비참함을 통해 인류가 갈구하는 평화의 소중함을 더욱 절실히 말해주고 있다.〈도쿄.朴淳國특파원〉
댓글 많은 뉴스
국힘 김상욱 "尹 탄핵 기각되면 죽을 때까지 단식"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 전원일치 기각…즉시 업무 복귀
"TK신공항, 전북 전주에 밀렸다"…국토위 파행, 여야 대치에 '영호남' 소환
헌재, 감사원장·검사 탄핵 '전원일치' 기각…尹 사건 가늠자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