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대구금융100년(29)-대구종금(1)

대구의 대표적인 제2금융기관 중 하나인 대구종합금융(주)도 지역 소재 다른 금융기관처럼 대구상공회의소가 산파역을 했다. 71년 이후 단기금융회사의 설립을 억제해 오던 정부가 5년만에 대전,인천,전주,마산등 4개 지방도시에 단기금융사의 신설을 인가하기로 방침을 굳힌다. 이에 대구에서도 상공인들이 대구상의를 중심으로 결의안을 채택하는등 영남투자금융에 이은 제2의 단기금융사 설립 추진에 나선 것.

79년8월27일 대구상의 회장단등 26명으로 구성된 가칭 대구투자금융(주) 제1차 발기인 대회를 열어 9월 설립 내인가를 재무부에 신청한다. 대구투금이 대구 일원 뿐만 아니라 대구,경북 전체 상공업계를 지원할수 있게 도내 5개 지방 상의회장을 발기인단에 포함시키라는 재무부의 지시에 따라 관계서류를 보완,이해 10월 내인가를 받아내기에 이른다.

11월 총 25억원의 자본금 구성작업을 끝낸 대구투금은 대구상의에 임시로 설치됐던 사무실을 대구시 중구 서성로에 위치한 한일빌딩(현 갑을빌딩) 2층으로 이전하면서 11월20일 창립총회를 개최했다. 출범 초기 초미의 관심사였던 대표이사 선임에는 이종왕 당시 대구상의 상근부회장이 거론됐으나, 금융기관 근무경력 10년이상이어야 한다는 재무부 방침에 따라 대구은행 원호출 상무가 초대 사장으로 내정된다.

이해 11월26일 회사 설립 등기를 마치며 정식 발족한 대구투금은 16명의 직원으로 단촐하게 출발한다. 개업일의 총 수신고는 48억원. 그러나 창립후 30개월만인 82년8월31일 수신고 1천억원을 달성하는 급성장세를 달린다.

83년7월7일 광명그룹의 계열사로 광명투자금융(주)이 영업을 개시함으로써 대구지역 단기금융시장은 영남, 대구, 광명 등 3개 투금사가 병립하는 치열한 경쟁체제를 맞게 된다. 그러나 83년 광명그룹의 충격적 부도와 함께 광명투금이 경일투금으로 상호를 변경하며 은행의 관리를 받게되면서 지역금융시장에서의 단기금융사의 공신력은 크게 실추됐다.

지방금융활성화의 일환으로 지방단기금융사의 서울영업사무소 설치가 허용되면서 대구투금도 서울시 중구 소공동에 서울영업사무소를 84년3월 개설했다. 투금사의 오랜 숙원인 어음관리계좌(CMA)와 기업어음(CP)의 취급도 허용됨으로써 대구투금의 영업력은 크게 확대되는 전기를 맞게된다. 이 상품들은 지금도 대구종금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영업상품이다.84년 대구투금의 성장기틀을 다져온 원호출사장이 사임함으로써 대구투금에는 일시적인 경영공백이 생긴다. 이에 홍전표전무가 대표이사로 직무를 대행하다 84년7월30일 2대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제2대 경영체제가 마련된다.

〈金海鎔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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