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을 위한 변명" 진학할 무렵 나는 부모님이 권하는 전공을 마다하고 철학을 택하겠다고 고집부렸다. 내 고집의이유는 단순했으나 숙명적인 내 의식의 약점을 보완하겠다는 것이었다. 어떤 까닭에서인지 그때나는 철학이야말로 내 빈약한 이성능력을 강건하게 다져줌으로써 병적으로 예민한 감성이나 지나치게 범람하는 열정을 속박하고 견제해주리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나만이 이런 순진한 믿음의 희생자는 아니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철학이 일종의 이성신앙같은것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전쟁에 참전했던 한 저명한 철학자의 전기에는 마치 배덕자의 신앙고백같은 고뇌에 찬 기록이 보인다. 그것에 따르면 그는 어느 전선에 배치되는 포성만 멈추면 참호속에서 배낭에 넣고간 플라톤의 '공화국'을 거듭거듭 읽었다. 그러던 그가 한번은 치열한 백병전 후에 가까스로 제정신을 차리고 아직 자기가 살아있음에 안도하면서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배낭속의 플라톤이 아니라 뒷주머니에 쑤셔두었던 마른 빵 한조각이었다는 것이다. 그것을 기록하면서 철학자는 말한다. '내가 그토록 비열할 수 있었다는데서 나의 자존심은 돌이킬 수 없는상처를 입었다. 그 실존적 상황에서 내게 소중했던 것들이 가령 신의 사랑, 철학자의 예지같은 저영원하고 보편적인 가치들에 대한 믿음들이 아니라 고작 한끼를 채울 빵조각이었다니'
◐빵 한조각의 소중함◑
한때의 본능에 관련된 열정이나 욕망은 이토록 속수무책으로 불온시되었다. 그래서 자칫 거기에빠져들었다가는 생애를 바쳐야할 전공학문으로 속죄하거나 한권의 긴 자서전을 쓰는 것으로 참회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형편이 달라졌다. 이제 몸은 의미와 가치의 진정한 뿌리로 주목받기 시작했고 오랜 세월의 더께 속에 잊혀져 있던 육감과 관능의 언어들이 복원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이런현상을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불려지는 프랑스 사조의 한 특성으로 상대화시키거나 새로운 세기의문턱에서 항용 보이는 세기말의 퇴폐사조 탓으로 돌리는 단순논리가 없지는 않다.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문명사의 그 기나긴 우회로를 거쳐서야 이제 인류는 몸의가치, 욕망의 의미들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즉 살과 뼈, 땀과 눈물은 저거룩한 진리의 전당에 묻은 부끄러운 얼룩이 아니라 우리가 받아들이고 껴안아야할 정직한 실존의 조건들임을 인정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몸과 그 욕망에 대한 저 집요한 경멸의 언어와 저 삼엄한
경계의 논리들도 뒤집어보면 그것들이 지닌 저 엄청난 반역의 힘들에 대한 형이상학자들의 두려움을 표현하는 것들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열정·욕망도 고귀한 것◑
결국 교육, 선도, 계몽등의 길들이기 전략이 필요해지고 이런 필요에 맞추어서 과장된 텍스트들이만들어진다. 거기에 상투적으로 등장하는 단골메뉴는 가령 배고픈 소크라테스와 배부른 돼지, 통속의 디오게네스와 말 위의 알렉산더등이다. 왜 배부른 소크라테스는 아니며, 비단침대 위의 디오게네스는 아닌가. 먹으려하고 마시려하며 쉬려하고 즐기려하는 욕망 그 자체는 저 뜰 안에 피어있는 한송이 장미꽃처럼 무죄한 것이다. 그런데도 왜 배꼽은 저렇게 경멸스럽고 욕망은 또 그토록 불온하다는 걸까.
물론 앞으로도 내가 대학시절 벌였던 저 힘겨운 싸움 즉 내 존재의 내부에서 어쩔수 없이 솟구치는 감성 세력과 강의와 텍스트로부터 퍼부어지는 이성세력 사이에 투쟁은 앞으로도 계속되리라.하지만 분명한 것은 '어디서나 이성과 논리는 열정과 욕망보다 고귀한 것이며 언제나 플라톤은빵조각보다 소중하다'는 믿음체계의 오랜 독재가 서서히 끝나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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