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영민의 세상읽기

"반찬호의 나라, 냄비들의 나라"

"오빠, 여기는 서기(西紀)를 안쓰네?" 남편을 따라 미국에서 일본에 건너간 내 누이가 전화로 던진 첫마디였다. "당연하지, 깡이 있는 놈들인데…" 불쑥 내뱉은 원색적인 말에 내 스스로 무안스러워 뒷말을 잇지 못하고 말았다. 우리의 공용연호가 단기에서 서기로 바뀐 것은 1962년인데, 그것은 위로부터의 조직적 근대화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라는 이름으로 구체화되던 시점이기도 했다. 그러나 개발에 취한 우리는 서구와 다른 우리 현대사의 특이성으로 말미암아 근대화와 민족주의가 서로 어긋나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탈냉전과 탈근대, 그리고 세계화를 외치는 지금까지 우리가 심층근대화와 성숙한 민족주의의 과제를 부여잡고 있는 것도 이유가 있다.'은근과 끈기'라는 말처럼, 일본과는 다른 뜻에서 우리도 '깡이 있는' 민족이었다. 오랜 역사가 만들어온 전통의 길과 맥(脈)속에서 우리의 삶은 자생력과 주체성을 창의적으로 계승했고 과거의추(錐)를 창발적으로 활용해서 미래를 전망하고 대처할 줄 알았다. 우리의 개인은 온고지신(溫故知新)으로, 나라는 법고창신(法古暢新)으로 나름대로 수신(修身)과 공동체의 성숙을 이루어가는지혜를 구체화시켜왔던 것이다.

그러나 '격동의' 20세기를 지나면서 모든 것은 일신되었다. 최근 박정희의 공과를 따지는 담론처럼 우리의 근현대사에도 몇마디로 줄일 수 없는 영욕과 희비가 있지만, 비판에 빠른 나같은 인문학자의 눈에 잡히는 것은 우선 식민지의 상혼과 사상의 냉전을 등에 업고 이룩한 급속한 물적 성장의 그늘아래 곪아가는 정신가치, 그리고 이로 말미암은 졸부주의와 잡탕문화의 활개다. 어린 아이에게 큰돈과 불씨를 맡긴 꼴이라던가? 세칭 '문화의 시대'에 들어선 우리 사회의 곳곳에는 공공의식과 사회적 책임이 내면화되지 못한 졸부들의 잔치, 그리고 자신의 전통과 주체성을 건사하지 못한 세태의 반작용에 다름아닌 문화잡탕의 카니발만 번성한다. 꽃의 아름다움은 뿌리에서 나오고, 삶의 지혜는 역사성에서 나오는 것이니, 우리 사회의 구석구석에 냄비같은 부박(浮薄)함이서식하는 것도 놀라울 바가 없지 않겠는가.

박찬호 신드롬을 보는 나는 한편 심기가 불편하다. 무슨 볼 것 하나만 터지면 온나라가 들썩거린다. '코리아 특급' 박찬호의 수확에 환호하는 국민들의 심사를 난들 왜 모를까. 여러 언론매체를타고 전세계로 전해지는 우리 근대화 프로젝트의 부실한 열매들-붕괴하는 교각과 백화점, 때아닌황태자가 된 대통령의 아들, 줄줄이 부도의 수렁에 빠지는 재벌들과 괌의 구렁에 빠진 민간항공기, 그리고 기아국으로 전세계에 소문이 자자한 우리의 반쪽 북한-에 우울하고, 21세기의 비전을제시하고 개혁으로 이를 구체화시킬 지도자의 부재에 쓸쓸한 우리 국민들의 눈에 박찬호의 분투는 고대하던 새로운 한국인의 이미지로 다가올만도 하다.

그러나 그를 보도하고 찬미하는 우리의 모습은 하나같이 물에 불은 채로 들끓고 있는 냄비우동,바로 그것이다. 전국민이 노래방과 단란주점에 출입하고, 전국민이 삐삐를 차고 핸드폰을 휘두르는가 했더니, 이제는 전국민이 박찬호로 북새통을 이룬다. 인류역사상 전무한 개성의 시대에 놀라운 몰개성의 천국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경직된 민족주의'가 끝나는가 했더니 '소란한 민족주의'로 탈바꿈했던가? 대체 뿌리깊은 나무 그늘 아래 샘이 깊은 물이 흐르던 마을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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