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慶州남산-선현의 시와노래

"금송정 옛터엔 옥보고 거문고 소리…" 국토 남산은 수많은 유물유적과 함께 신라이래 인구에 회자된 많은 선현들을 품에 안은 땅이었다. 악성 옥보고와 최치원,최광유,충담과 매월당 김시습…. 세월의 무게를 짐작케하는 유적처럼 이들의 자취도 천년 세월동안 흔적마냥 어렴풋이 후세에 남아 감회를 새롭게 한다.명산은 많은 인재를 낳는 법일까. 수천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인물들이 넉넉한 남산의 그늘에들었다. 때로 팍팍한 시류를 탓하며 세상을 벗어나 초연한 삶을 꾸리거나 학문을 닦고 남산을 노래하기도 했다.

선현들의 발자취를 따라 남산을 오른다. 이골 저골마다 이들의 시와 노래, 거문고소리가 둥기둥기떠돌아 귓전을 두드리듯 아련하다. 포석골 입구에서 5백m쯤 지난 오른편으로 난 골짝이 기암골(배실). 이 골을 따라 오르면 냉골 암봉의 정상에 이른다. 금오산에서 서북쪽으로 얼마간 치우쳐있는 암봉 정상에는 사방 5m넓이의 터를 확인할 수 있다. 금송정(琴松亭)터로 추정되는 곳.금송정이 금오산 정상에 있다는 세종실록지리지 의 기록과는 달리 향토사학자들은 이곳 정상에금송정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금송정은 신라 예술의 황금시대였던 경덕왕때 위대한 음악가인 옥보고가 거문고를 탄 곳으로 알려진 정자다. 지리산에 들어가 50년동안 음악을 수학했다는 그는 신조(新調)와 상원곡, 중원곡등 30여곡을 지어 신라음악을 발전시킨 악성. 정자앞에 버티고 서있는 봉생암이라는 바위는 옥보고가 거문고를 탈때 봉황새가 날아와서 춤을 추다가 앉은 바위라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년 신라의 한이 서린 포석정. 소나무 그늘아래 굽이굽이 포석이 휘돌아가고 경문왕때 명성이 높던 시인 최광유(崔匡裕)의 포석정 주악사(奏樂詞) 가 여울물결 금빛 술잔에 실려 들려오는듯하다. …소나무 잣나무 서로 어울려 무성한데 넝쿨은 온통 하늘 덮었네/머리를 돌려 보는 곳마다진달래 꽃 피고 피어 짙붉은 웃음 골짜기에 가득차 넘고/으스름 실안개는 몽롱하기만 하네 영화롭던 신라 천년이 막을 내리게된 비극의 현장이어서일까. 조선조학자 조위(曺偉), 조식(曺植)도 포석의 애달픈 사연을 시로 읊어 후세에 남겼다.

종(端宗)의 애사도 남산에서 찾을 수 있다. 읽던 책을 불살라버리고 머리를 깎고 출가, 방랑생활을 한 21세의 청년 매월당 김시습. 설잠이라는 법명으로 양주 수락(水落)과 설악등 명승지를 두루돌아다니며 방랑하다 금오산에 머문 매월당은 처음 은적골 은적암에 머물다 용장사로 옮겨와 최초의 한문전기소설 금오신화(金鰲新話)를 남겼다.

오산에 온 뒤부터 먼 데 가기를 즐겨하지 않고 매화와 대를 읊으며 취해 즐겼다는 매월당의 용장산동유(茸長山洞幽) 시구절에서 피와 눈물로 얼룩진 조선조 어린 임금의 슬픈 사연이 전해져온다.

매월당이 영월에 유배된 어린 단종을 못잊어 뜨락에 핀 꽃을 바라보며 슬퍼했는데 북향화(北向花)라고 불리는 이 꽃은 용장사부근에만 많이 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설잠은 승복을 벗고 환속했으나 곧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영조때 용장사에 매월당사를 세우고 설잠스님을 기리며 명복을 빌었다고 하나 그 사당터도 지금은 어디인지 알 길이 없고 용장사도 파괴되어 돌축대와 일부 유적만 남아 세월무상을 말해주고 있다.

용장골 깊으니 들매화를 곱게 흔들고 작은 창가엔 함께 잠든 사슴들. 낡은 의자에 먼지만 재처럼앉아 억새처마 밑에서 깰 줄을 모르는구나/들에는 꽃들이 지고 또 피는데 (설잠스님의 시).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