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전통정원 소쇄원

초여름 화사함으로 다가오던 장미나무, 조그만 꽃송이와 까만 씨앗을 수줍게 내보이던 채송화….언제부턴가 우린 마당과 뒤뜰을, 소담스런 정원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묘하게도 옛 선비의 절의와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자연의 넉넉함 덕분일까. 온통 회색빛가득한 도심의 번잡함, 그 뒤안길로 아담한 정원 하나가 고고히 남아 푸르름을 더해간다.'숲과 골이 구름속에 숨었으니 군자에게 도심(道心)이 생생하네. 바람속 소나무는 신비한 피리소리를 내고 달아래 대나무는 맑은 그늘을 띄웠네'

남도땅 소쇄원(瀟灑園·전남 담양군 남면 지곡리).

송강 정철이 노래했듯 세속을 떠나 칩거하며 자연속에서 학문을 닦고 은둔하기에 안성맞춤이었던원림(苑林).

조선 중종때 학자 양산보(梁山甫·1503-1557)가 1519년 기묘사화로 스승 조광조가 전남 능주로유배돼 사약을 받게 되자 출세길 대신 은둔생활을 하며 조성한 조선 중기의 대표적 명원(名苑).완도 보길도 부용동 원림과 함께 자연경관을 잘 이용한 전통 정원으로 이름나 있다.진입로 앞 1천2백여평의 주차장을 지나 10분쯤 울창한 왕대숲을 지나면 모습을 드러내는 삿갓지붕의 초당(草堂), 대봉대(待鳳臺). 봉황을 기다리는 곳이라는 명칭에 걸맞게 손님을 귀히 여기던옛 선비의 풍류와 겸양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소쇄원의 특징은 계곡물을 품고 조성됐다는 점.

흙돌담 밑으로 계류의 물이 다섯번을 돌아 흘러내리곤 했다는, 지금은 사라진 오곡문(五曲門). 그계곡물을 가운데로 하고 남서쪽에 놓인 주인의 사적 공간인 제월당(霽月堂), 토론장 기능을 한 광풍각(光風閣)등 건물과 다양한 수종의 나무들이 모두 물의 흐름을 중심으로 배치, 자연과 사람의일체감을 보여준다.

무이구곡(武夷九谷). 부정한 현실을 버리고 자연속에 은둔하는 도교적 사상과 유교문화를 배경으로 한 소쇄원에는 예로부터 정철, 기대승, 의병장으로 알려진 고경명, 양산보의 사돈인 김인후등당대의 쟁쟁한 학자들이 출세와 명리대신 풍류를 즐긴 곳이기도 하다.

축조 당시 제주도 출신의 역정(役丁)들이 동원돼 1만여평 규모로 지었다고 전하지만 오곡문과 운치를 다하던 물레방아등은 모두 정유재란때 소실되고 현재는 내원만 남은 상태. 1천3백50평의 단촐한 규모다.

1775년 영조때 만들어진 목판 '소쇄원도'(작자 미상)에 바둑과 가야금을 즐기는 모습, 건물과 나무의 명칭, 연못, 바위이름등 소쇄원 배치도가 판각돼 있었다고 전하나 이 그림 또한 지난 84년도난당해 진품을 찾아볼 길 없다(대부분의 답사안내서적엔 이같은 도난 사실이 빠져있다).다만 소쇄원도의 탁본을 보고 광주의 전각가 조정숙씨가 목판으로 재현해 종이에 찍은 작품이 광주비엔날레 커미셔너중 한사람인 하랄드 제만(97 리옹비엔날레 총감독)에 의해 지난 1일 개막된'97 광주비엔날레' 본전시중 하나인 '속도'전에 출품돼 얘깃거리를 보태기도 했다. 이 작품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물에 관한 드로잉과 나란히 전시돼 물에 대한 동서양의 시각을 비교해주는 계기가 되고 있다.

현재 중심건물인 광풍각안에 걸려있는, 낡은 듯한 그림 한 점은 관람객들로부터 종종 진품 소쇄원도가 아니냐는 혼동을 일으키게 하는데 이는 지난 90년 소쇄원 동호회원 박민숙씨가 그린 작품으로 원본과는 무관하다.

4백70여년 세월의 무게와 풍상을 감당하기엔 벅찬 것일까. 문학, 건축관련 대학생들과 전문인의발길이 연중 끊이지 않는 소쇄원은 동시에 전남지역 대다수 초중교 학생들의 단골 답사과제 대상으로 굳혀져 사시사철 몰려드는 학생들로 쇠락일로에 접어들고 있다.

소쇄원 동호회원인 전남대 건축과 천득염교수(44) 는 "쉴새없이 밀려드는 관람객들로 인해 축대와 담장이 무너지고 희귀 나무들이 고사하는등 피해가 잦다"며 "안식년제를 도입하는등 보존책을마련하고 철저한 고증을 통해 소쇄원을 원래 규모대로 복원하는 작업을 서둘러야 한다"고 지적한다.

천교수는 그간의 연구를 토대로 오는 10월 '한국의 명원(名苑)-소쇄원'이란 제목의 단행본을 발간, 소쇄원 역사와 조형 배경, 관련자료등을 문헌으로 남기는 동시에 시설 보존 여론도 환기할 계획이라 전한다.

'물을 쏘아 올리는 분수는 하늘을 거역하고 인공적인 전지작업은 자연을 거스른다'.올 가을,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옛 사람들의 순리(順理)에 다름 아니다.

◈소쇄원 찾기(약도)◈

88고속도로→담양인터체인지 통과후 좌회전→15번 국도→고서면 표지판 보고 좌회전→887번 지방도→소쇄원. (0684)82-1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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