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란하지도 않고 재촉하는 것 없이 넉넉하고 여유로운 사유속으로 독자들을 이끄는 산문. 부담없는 문체와 삶에 대한 원숙한 관조는 인생과 자연에 대한 성찰의 깊이를 더한다. 느린 걸음걸이에는 생각이 깃들 듯 산문의 행보는 느리다. 그래서 산문읽기는 가을이 제격이다.산문을 읽으며 낙엽쌓인 숲길을 벗도 없이 혼자 걸어갈때처럼 맑은 기쁨과 투명한 감동을 맛보자. 풍성한 수확을 향해 달려가는 이 가을에 읽을 만한 산문집 몇권을 소개한다.지난해 나온 신영복 교수의 '나무야, 나무야'(돌베개)는 지금도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 베스트 셀러. 시대를 넘나드는 이야기가 지워지지 않는 무게로 다가온다.
책속에 가슴 아픈 사진이 한 장 있다. 어린 남매의 무덤을 보듬고 있는 젊은 어미의 무덤을 찍은사진이다. 남편의 방탕과 학대, 사랑하는 오라버니 허균의 유배와 죽음, 어린 남매의 죽음을 감당한 허난설헌의 스물일곱 짧은 생애가 오롯이 묻힌 곳. 신사임당의 품위있는 오죽헌보다 초라한허난설헌의 무덤을 찾은 저자의 발길이 착잡하다.
강원도 영월군 청령포 단종 유배지에서 저자가 던지는 화두는 사멸하는 것은 무엇이고 사람의 심금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 왕가에 태어나 무고하게 유배되고 살해된 단종과 동냥과 염색업으로 연명하는 단종비의 통곡이 들려오면 함께 가슴을 치며 동정곡을 해주던 마을 여인들의 이야기가 시대를 넘어 가슴에 와닿는다.
김용택 산문집 '그리운 것들은 산 뒤에 있다'(창작과 비평사). 자연의 순리를 거역하지 않으며 살아온 소박한 농촌 이웃들의 결 고운 마음과 우리 기억 저편에 떠오르는 어린시절의 아련한 추억을 담았다. 달 뜨고 박꽃 핀 우물가의 정경, 스러져가는 것들의 적요한 운명을 따뜻하면서도 아름답게 그려내고 있다.
돼지 잡는 날, 앙꼬 아이스케키의 추억, 동춘할매 등 잊지 못할 추억이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이해인 글모음 '사랑할 땐 별이 되고'(샘터)는 밤하늘의 별들처럼 흩어져 살면서도 각자의 자리에서 조용한 빛을 뿜어내며 향기를 발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담았다. 테레사 수녀에게 바치는 편지와 일상의 단상을 담은 수필, 기도시, 기도일기가 욕망에 찌든 현대인에게 부끄러움으로 다가온다.
민음사에서 펴낸 장 그르니에의 에세이 선집 '섬', '카뮈를 추억하며', '어느 개의 죽음'도 이 가을에 읽을 만한 에세이다. 프랑스 산문의 정화라고 일컬어지는 이 산문집은 기계의 소음에 익숙해진 현대인에게 인간과 삶에 대한 사랑이라는 소재로 삭막함을 걷어낸다.
국내외 명작에세이를 가려 뽑은 '세상에서 가장 감동적인 이야기'(정채봉 외 지음, 동쪽나라 펴냄)와 '세상에서 가장 슬기로운 이야기'(고은 엮음, 동쪽나라 펴냄)도 이 가을에 향기나는 글을담았다.
〈李春洙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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