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빛 가을 들녘, 홀로 우두커니 선 허수아비를 본 일이 있는가.
알곡을 탐내며 날아드는 새떼가 미워 돌 하나 던져보지만 그래도 눈한번 꿈쩍않은채 논에 붙박혀히죽 웃고 있는 허수아비. 그 바보스러움에 발길을 돌리지만 왠지 그 모습이 남같지않은 살가움으로 치밀어올라 한번쯤 뒤돌아보곤 했던 유년의 기억.
그리움은 멀수록 더욱 절실한 법. 누구나 가졌음직한, 그러나 이젠 사라져버린 추억을 떠올리게하는 허수아비들의 한판 축제가 열리고 있는 서해안 군산땅으로 찾아가본다.
지난달 29일 전북 군산시 문화동 진포문화예술원. 나지막한 단층건물 한켠 잔디밭에 폐품과 헌옷,대나무로 만든 갖가지 형상의 허수아비 1백50여개가 가든파티를 벌이는 양 단장하고 늘어서 제각기 차림새를 뽐내고 있다.
강아지인형을 안은 댕기머리 낭자, 양산을 곱게받쳐들고 미니스커트를 차려입은 아가씨, 깡통을주렁주렁 몸에 단 로봇, 육군대위 계급장의 군인, 피에로, 아프리카 어느 원시부족의 방패를 연상케하는 형형색색의 허수아비….
밀짚모자와 새마을 모자를 쓴 허수아비가 드문 것은 세월 탓일까. 그래도 어느 허수아비의 몸통에 씌인 초등학생의 또박한 글씨, '우리 것을 아끼자'.
1일 본격 막을 올린 '97 군산 허수아비미술제'는 이같이 우리 옛 전통과 농경문화의 상징인 허수아비를 소재로 시민들이 적극 참여하는 이색적인 현대미술제를 열어보자는 취지에서 비롯됐다.1899년 개항이후 일제에 의한 호남 쌀수탈의 역사와 1990년대 서해안 산업중심지를 관통하는 역사를 거치는 동안 타지역에 비해 열악한 문화환경속에서 변변한 시민축제 하나 가지지못했던 군산 시민들의 희망과 '현대미술은 어렵다'는 일반 대중의 막연한 오해를 깨쳐보자는 미술인들의바람이 의견일치를 본 것.
'일어서는 땅, 산, 들, 강, 바다, 사람'이란 부제로 12일까지 군산시 전역에서 펼쳐질 이번 미술제의 하이라이트는 3일부터 옥구들녘에서 열릴 국내 최대 규모의 '들판 설치전'. 전북·대전지역 작가 72명의 작품과 '시민 허수아비 만들기 대회'를 통해 각 문화예술단체와 학생, 직장인, 일반 시민이 직접 만든 4천여개의 허수아비들이 군산시에서 대야면에 이르는 2.5km구간에서 펼쳐진다.전북도내 5백여명의 풍물패가 참가하는 길놀이와 허수아비를 주제로 한 퍼포먼스도 이날 오후2시종합경기장에서 열린다.
또 홍현기, 정한섭, 신정주, 김용수, 한은미, 송광익씨등 대구 작가 6명을 비롯, 전국 미술인 1백15명이 참가하는 실내 미술전도 1일부터 12일까지 군산 시청사 전시장에서 열리고 있다. 한국화와서양화, 공예, 조각, 사진, 영상등 허수아비를 주제로 한 전 장르의 작품이 망라돼 볼거리를 더한다.
미술제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는 군산대 이건용 교수(55·미술학과)는 "쌀과 농촌에 대한 건강한자랑을 심어주고 허수아비라는 단일한 소재를 미술과 접목해 시민들의 잠재적 예술성을 일깨우는것이 이번 행사의 의의"라며 "짧은 준비기간탓에 전국 작가들의 작품을 고루 출품받지 못해 아쉬운 감이 있다"고 밝혔다.
이번 미술제는 특히 지난 6월 문예진흥원이 특정 계기나 주제아래 열리는 대규모 미술행사와 전시를 집중지원하는 '전국 우수 기획전 지원사업'으로 선정돼 지역 축제의 '예술적 실험'의 성공여부를 가늠케하는 사례가 될 것으로 보여 단순한 축제 이상의 의미도 지니고 있다.이번 행사의 예산은 4천3백만원. 허수아비가 단순한 생활의 도구가 아닌, 하나의 조형물로서 인식되는 까닭에 부족한 예산은 30만 군산시민의 열정과 땀으로 보충될 것이라 전한다.허수아비축제는 매년 개최될 예정이지만 내년부터는 미술에 국한됐던 장르를 타분야로까지 확대,종합예술제로 개최될 예정이어서 이색적인 시민축제로 자리매김하게 될 예정이다(문의:군산 허수아비미술제 제전위원회 (0654)471-1616).
4천여개의 허수아비가 내걸린 풍요의 옥구들판, 허수아비미술제전위원회 명예위원장을 맡은 시인고은의 시가 넉넉한 가을 일몰을 가로지른다.
'더도 말고
내 고향 가을만 하여라
덜도 말고
내 고향 가을논만 하여라
더이상 무엇을 바라리오
하늘은 높고
황금물결 아득하여라
거기 하루내내 서있는 허수아비만 하여라
새떼 함부로 내려오다가
에그머니
에그머니
우르르 떠나야 하는
내고향 허수아비 아저씨만 하여라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오로지 누덕누덕 헝겊 쪼가리, 그것으로도
내 고향 저녁노을 그리운 아저씨만 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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