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목요칼럼 '세풍'-은행이 부도났나

도쿄대첩-그건 월드컵축구사에 길이 남을 명승부전이었다. '차범근사단'이 대일전(對日戰)경기종료 불과 7분전에 곡예사처럼 연출해낸 대역전극이었기 때문이다. 환상적인 3각패스의 동점골이그랬다. 25m중거리슛은 골키퍼 손앞 땅에 한번 튕긴뒤 골네트로 빨려들었기에 신이 연출한 한편의 드라마였다. 이 순간을 TV로 몇번이나 다시 봐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 지난 수년동안 이처럼한국인들을 신나고 살맛나게 한 적이 없다.

박찬호의 14승과는 또다른 감회다. 그러나 김포공항으로 개선해 오던 차범근감독은 굳은 표정으로 일관했다. 서울에서 곧 있을 일본팀의 대반격이 우선 걱정이었다. 당장 4일로 닥친 아랍에미리트와의 경기도 만만찮다는 애기였다. 승리했을 때의 그 환호가 패배하는 순간엔 매몰찬 질타로돌변하는 '대중'의 속성을 그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접근해오는 취재진에게 '숱한 찬사'보다는건드리지 않는게 도와주는 것이라며 철저히 차단했다. 그리곤 늘 그렇듯이 컴퓨터를 열어 차근차근 챙겼다. 긴장을 못풀게 선수들을 채근질하기에 여념이 없다. 신뢰가 가는 이 시대에 걸맞은 지장(智將)을 우리는 운좋게 길러낸 것이다. 설사 남은 경기에서 실패를 한다해도 '우리축구'는 한참동안 그에게 맡겨야 할 것같다. 그를 신뢰하는 만큼 그는 분명 뭔가를 이룩해내고야 말것같은예감을 왠지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서독 분데스리가에서 맹활약한 그의 경험을 토대로 '한국축구'의 도약발판을 반드시 구축해낼 믿음이 배어나오고 있다. 그리곤 바통을 또다른 유능한 후배에게 물려주고 성큼성큼 뒷모습을 보일것같다.

문제는 이번 한·일전결과를 보는 대선주자진영의 행태가 실망스럽기 짝이 없다는 데 있다.축구승전보를 아전인수격의 희한한 발상으로 해석한 그 대목부터다. 역전승의 의미를 하락된 지지율 제고지표로 갖다붙인건 그럴수 있다치자. 동점골 주인공 서정원선수의 후반교체 성공전략을'후보교체론'에 대입하는 대목은 그야말로 가관이다. 유일하게 현지서 경기를 관전했다는 그 자체를 대권 천운(天運)으로 비약하는 견강부회는 말 그대로 점입가경이다. 젊은 선수들의 패기를 '젊은 후보'의 대권당위성으로 해석하는 대목은 다름아닌 '꿈보다 해몽'격이랄까. 대한민국 대통령후보진영의 사고가 기껏 이것밖에 안된다니 기가찬다. 국위선양을 위해 사력(死力)을 다해 일군 승전보에 이런 코미디언 농담처럼 얼토당토 않은 수사로 얽어맨다니 아이들 장난도 유분수다.진심에서 우러나온 찬사와 함께 축구전용구장 건립등 그들의 노고에 걸맞은 체육진흥공약이라도내놓는게 도리요 최소한의 예의다. 누구를 믿고 지지를 할 것이냐로 고민하는 부동층이 유독 많은 까닭이 이런 유의 비상식적 정치행태가 그 연유이다. 그렇잖아도 지난 대선때의 '잘못된 판단'의 재연이 되지않을까 가뜩이나 걱정스러운 터이다.

정작 대선후보들이 눈여겨 봐야할 대목은 따로 있다. 서울에서의 한·일전 예매행렬이 새벽부터은행앞에 늘어선걸 본 어느 아주머니는 은행이 부도가 난줄 착각하고 부랴부랴 집에서 통장을 갖고 줄을 섰다는 그 장면이다. 현 난국에 대한 온 국민들의 불안심리가 강박감에 사로잡혀 있다는한 단면의 표출이다. 대선후보들의 달변이 자꾸만 거짓말로 들리는 불신의 반작용이 헛것으로 보이게 하고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거두절미하고 '당선만 시켜주면 다 해결하겠다'는 투의 논리가먹혀들지 않고있다는 얘기다. 그래서 '예라, 모르겠다. 또 속는셈 치자. 누구보단 못할까'라는 자포자기론이 점차 늘고있다. 기가 찰 노릇이다. 그래서 정치판보단 축구가 훨씬 돋보이고 이기면이렇게 신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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