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명화의 고향-전함 포촘킨

"우크라이나 오데사 항구" 무성영화 시대의 걸작, 사회주의 리얼리즘 영화의 교과서 세계 영화사에 한 획을 그은 소련의거장 세르게이 아이젠쉬타인 감독의 대표작 전함 포촘킨 (1925년작)에 따라다니는 화려한 수사들이다.

아이젠쉬타인 이라는 이름이 주는 마력은 아직까지 여전하지만 사회주의가 현실 세계에서 궤멸되면서 과거와 같은 권위와 명성은 빛을 잃어 가고 있다.

아이젠쉬타인의 생애 2번째 작품인 전함 포촘킨 의 배경이 됐던 흑해 연안 항구도시 오데사는흑해의 관문으로 흑해의 진주 라는 별명과 함께 휴양지로 이름을 떨쳤지만, 지금은 사회주의 혁명의 몰락을 상징하듯 활력을 잃고 가라앉은 분위기다.

영화의 배경은 1905년 전함 포촘킨호 위에서 벌어졌던 반란사건. 당시 러시아 전역에서는 가혹한짜르의 전제정치에 대한 인민들의 불만이 고조되고 있었다.

포촘킨호의 수병들도 이러한 분위기에 동요되고 있었는데 병사들 중 혁명 사상을 갖고 있던 바쿨린치크(알렉산드르 안토노프 분)등이 동료들을 선동하고 있었다.

병사들의 불만을 부추긴 것은 비참한 선상 생활. 장교들은 거칠게 선원들을 다루었다. 밤이면 수병들은 거미줄같은 해먹 위에서 잠을 청하며, 부조리한 세계에 대한 불만을 토해냈다.어느날 아침 선원들은 부식으로 쓰일 고기가 상한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군의관은 구더기가 나오는 고기를 보고도 먹어도 괜찮다는 억지 판정을 내려 병사들을 분노하게 했다. 선원들은 항의의 표시로 식사를 거부한다.

부하들의 반항에 화가 난 선장은 선원들을 갑판에 집합시킨후 충성의 표시로 썩은 고기로 만든스프를 먹을 의사가 있는 편과 없는 편으로 나누어 서게한다. 그리고 끝까지 먹기를 거부하는 병사들을 사살하라고 명령한다.

총살이 집행되려는 순간 바쿨린치크가 나서 총살집행조 병사들에게 형제를 쏘지말라 고 외치며반란을 선동한다. 순식간에 흥분한 병사들은 선장을 비롯한 장교들을 공격하고 선상에서 격투가벌어진다. 반란 주동자 바쿨린치크는 선장의 총에 맞아 숨지지만 사병들은 모든 장교들을 살해하고 배를 해방시킨다.

수병들은 바쿨린치크의 시체를 오데사 항으로 가져오고 이 시신은 혁명의 상징이 된다. 시신과더불어 그는 한 숟가락의 스프 때문에 죽었다 는 구호가 짜르 체제의 폭정에 시달리던 오데사시민들의 마음을 파고들었던 것이다.

오데사 시민들은 수병들의 반란에 동조해 봉기한다. 시위행렬이 오데사 항에서 오데사 총독관저로 향하는 유명한 포촘킨 계단을 오르고 있을 때 정부군 병사들이 계단위에 배치된다.진압부대는 계단을 천천히 내려오며 사격을 시작하고 비오듯 쏟아지는 총탄속에 시위대는 무너진다. 그때 어느 어머니가 쓰러지면서 아기가 탄 유모차가 계단을 미끄러져 내려온다. 사람들은 이유모차를 세워 아기를 구하려다 죽어간다.

결국 수많은 희생자를 남긴채 오데사의 봉기는 실패한다.

한편 반란선 포촘킨을 진압하기 위해 정부군 함대가 접근한다. 포촘킨 수병들은 최후를 맞을 각오를 하고 전투준비에 들어간다. 그러나 다가온 진압군 함대에서 포탄이 쏟아지는 대신 선상의수병들이 포촘킨 수병들에게 환호를 보낸다. 병사들이 한 덩어리가 되어 만세를 외치는 가운데영화는 막을 내린다.

65분짜리 흑백 무성영화인 전함 포촘킨이 세계 영화사에 남긴 영향은 지대하다. 할리우드가 주도하던 영상문법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조금 낯설지만 영화를 선전선동의 도구로 인식하던 측에서는전함 포촘킨이야말로 교과서였다. 포촘킨 계단의 장면에서 보여준 사실적 표현기법이나 논리적으로 감정을 고조시키는 수법은 이후 다른 영화에 영향을 미쳤다.

영화 포촘킨의 가장 큰 특징은 주인공이 없다는 점. 바쿨린치크를 포함한 수병들과 오데사 시민들 모두가 이야기를 이끌고 나가지만 어느 한 인물을 영웅으로 만드는 법이 없다. 역사의 주인공은 민중이라는 철학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오데사는 제정러시아 시대에 예카테리나 여제에 의해 본격적으로 개발된 중요 무역항인데 해수욕뿐만아니라 온천과 신경통 등에 좋다는 진흙이 유명해 휴양지로서도 번성했다.포좀킨의 계단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서 항구로 내려가는 길목이다. 1837년에서 41년 사이에 건설됐다는 이 계단은 모두 1백92개, 제일 윗계단의 폭은 12.5m이지만 제일 밑계단은 21.6m로서 아래로 내려올수록 폭이 넓다.

일찍이 무역항으로 또 관광지로 많은 외지사람들이 드나들었던 탓인지 오데사는 경직된 슬라브적인 분위기와는 다른 유럽적인 자유스러움이 배어나온다.

이 때문에 이곳 사람들은 자유에 대한 갈망이나 저항정신이 남달랐다. 2차대전 당시에도 독일군에게 점령되었으나 레지스탕스의 저항이 계속되었다.

전함이나 계단의 이름은 모두 러시아귀족 포촘킨의 이름에서 딴 것이다. 그는 예카테리나 여제의애인으로 흑해지역을 다스렸다고 한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러시아 역사에서 손꼽히는 여걸로 화려한 남성편력으로도 유명하다. 그녀는총애하는 애인에게 큼직한 영지를 주어 다스리게 했는데 포촘킨 말고도 또다른 여제의 애인 보론쪼프가 흑해지역의 세도가였다.

그의 궁전은 포촘킨 계단위의 언덕에 서 있었다. 한때 화려했던 전체주의의 흔적과 이 체제를 쓰러뜨리려했던 혁명의 유적은 이렇게 가까이 있었다.

〈오데사(우크라이나).金起顯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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