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국채보상운동 90주년기념 심포지엄

국채보상운동 90주년을 맞아 학문적 토대를 구축하기 위해 17일 오전9시30분부터 오후5시40분까지 대구문화예술회관에서 '국제학술심포지엄'이 열렸다. 이날 주제발표자들의 논문내용을 요약한다.

▨김광두교수(서강대.외채현황과 대응방안)

우리나라 외채는 절대액 면에서 경상수지 적자가 근본원인이고 만기구조면에서는 단기자본 비중증가로 볼 수 있다.

경상수지 적자는 본질적으로 우리 산업의 경쟁력 약화에서 비롯돼 단기적으로 개선의 여지가 적지만 국채보상운동 정신을 되살릴 경우 단기적으로 처방할 수 있는 길이 있다.그것은 해외여행과소비재 수입을 국민 스스로 자제하는 일이다.

최근 2~3년 사이 우리의 여행수지 적자폭이 경상수지 적자폭의 10%%에서 25%%로 높아졌다. 소비재 수입이 전체 수입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93년 10.5%%에서 지난해는 11.3%%에 달했다. 우리는 지난해 1억8천7백만달러의 외제 위스키를 마셨고 14억3천5백만달러의 외제 옷을 사입었다. 여성들은 3억4천9백만달러 상당의 외제화장품을, 남성들은 3억1천9백만달러의 외제담배를 피웠다.국채보상운동 정신을 계승, 발전시킬 수 있다면 여행수지 개선과 소비재 수입액은 크게 감소할수 있을 것으로 본다.

▨박영규 전대구MBC상무 (국채보상운동 발기과정에 대한 고찰)

1907년 1월 대구의 서상돈등이 발기해 순식간에 전국민애국운동으로 확산된 국채보상운동은 여느독립운동처럼 미완의 미기로 끝났다.

이 운동은 구한말 애국계몽운동의 중심적 위상을 차지하는 매우 중요한 민족운동이었으며 을사조약 이후 흩어져 있던 국민의 힘을 결집시키고 애국심을 불러 일으켜 민족 역량을 축적, 이후 항일운동으로 이어지게 한 국권회복운동이었다.

이때문에 국채보상의연금은 '국민의 땀과 피'라고 표현됐으며 처리회(회장 유길준)는 보관의견서에서 '이 돈으로 현재 국채를 청산치는 못해도 국부를 증진하는 동기가 여기서 일어나며 산업을장려하는 도화선이 여기에 숨어있다'고 규정하기도 했다.

국채보상운동 90주년을 맞은 오늘의 시점에서 우리가 온갖 역사의 시련을 극복하고 경제대국의반열에 들어선 것도 90년전 국채보상운동에서 보여준 민족의 단합된 나라사랑 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강만길 교수(고려대.국채보상운동의 역사적 성격)

국채보상운동은 민족부르주아지 계급이 주도한 민족운동으로 평가된다. 조선 중기 이후 형성되기시작한 신지식인과 신자산계급 등 민족부르주아지 계급이 조선의 독자적 자본주의 발전을 주도하는 역사적 임무를 일본 제국주의에 박탈당하자 국채보상운동을 통해 반일민족운동을 펼쳤던 것이다.

예컨대 1907년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을 발의한 서상돈 광문사 부사장은 민족적 신자산계급으로,김광제 광문사 사장은 신지식인으로 각각 분류된다.

당시에 나온 관련 문헌들을 봐도 황제와 황실보다 국가와 민(民)을 강조하는 공화주의적 특성을나타내는등 국채보상운동의 민족부르주아지적 성격이 뚜렷하다. 국채보상운동은 대구에서 전국으로 확산돼나가는 가운데 상인.교원.전관료 등 중소 자산계급이나 근대적 지식인의 참여가 늘어나는 등 민족부르주아지적 성격을 강화시켜 나갔다.

그러나 국채보상운동은 이후 귀족.매국관료.일제와 결탁한 대자본가 등 반민족적인 친일세력의 참여로 운동의 성격이 변질되는 한계를 노출하다 급기야 일제의 탄압이 강화되면서 실패로 끝나게된다.

그러나 결국 근대적 민족국가의 성립을 주도하는 민족부르주아지 계급이 19세기 말 조선에서는성공적으로 형성되지 못했다는 것이 한일합방과 국채보상운동 실패의 공통적인 원인인 것이다.

▨박용옥교수(성신여대.국채보상운동과 여성활동)

국채보상운동에 대한 여성들의 적극적인 참여활동은 한국 근대여성운동사에서 여권 회복의 결정적인 역사적 계기가 된 것으로 평가된다.

박교수는 국채보상운동의 출범기에는 참여 기회를 가지지 못했던 여성들은 운동이 활성화되면서정해진 의연금 액수를 크게 웃도는 성금을 내는 등 근대적 '국민의식'을 적극적으로 표출했다. 특히 초기의 개별적인 참여 형태가 운동의 열기가 고조되면서 여성단체 단위의 조직적 활동으로 전환되어 나갔다는 점도 당시 여성 국채보상운동의 특징이다.

여성들은 패물 및 쌀 갹출, 또는 당시 사회적인 천시를 받았던 '물긷기 노동'으로 번 돈을 성금으로 내는 등 다양한 형태의 의연금 출연 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지역별로는 정치.경제.문화 및 상공업 중심 도시와 항구도시에서 여성의 운동 참여가 활발했으며,신분별로는 농민.상인.기독교인 등이 적극적인 활동을 벌여 여성계 지도층의 중심이 양반층에서하층으로 내려가는 추세를 반영했다.

그러나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한 여성들의 평균 출연액이 50전 미만의 소액에 그쳤던 것은 가부장적 의식의 잔존과 부유층 여성들이 이 운동에 비협조적이었기 때문이라고 박교수는 설명했다.〈崔正岩.李宗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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