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부문-당신께서 남겨놓으신 세월의 흔적을" 스산한 10월의 바람이 붉은 태양의 빛깔을 들이마신 나뭇잎 사이사이로 비집고 들어간다. 그리고는 곧 그 빛깔의 향내를 묻히고는 저멀리 어디론가 멀어져 간다. 저 바람이… 그곳까지 가 주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네모난 그 방, 당신께서 반듯하게 누워서 천장을 보며 한숨을 내뿜고 계시는 그 방…. 세월이라는 여울목에서 허우적거리시다가 시간이 가고 힘이 부치고 이제는 저 깊은 곳으로 가라앉기만을 기다리고 계시는, 그 어르신이 계시는 그 방 구석구석까지…. 오늘 아침, 1주일만에 전화를 건 손녀에게 당신의 건강은 안중에도 없으시고 아픈데는 없느냐,공부는 잘 하느냐 등 오직 손녀딸 걱정만 하고 계시던 그 어르신….
가슴 저 구석에서 지릿한 고통이 번져 나온다. 하늘에다 기다란 천을 매달아서 펴들고 있으면 그천을 따라 새파란 물이 주르르 떨어져 내려올 것 같은데…. 10월의 나뭇잎은 저토록 고운 자태를자랑하고 있는데 …. 이렇게 아름다운 가을이 있는데, 세월의 흔적을 가득 지고는 오늘도 가을이아닌 고독을 몸 속에 켜켜이 재어 놓고 계시는 나의 할아버지…. 그는 …. 언제부터 그 고통에 익숙해지게 되신 건지….
따르릉 따르릉. 일요일 새벽의 고요함을 깨뜨리는 전화벨 소리에 엄마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졸리는 눈을 거물거리며 전화를 받았다.
"제수씨세요? 일찍부터 죄송합니다. 동생… 있습니까?"
큰아버지의 다급함이 전화선을 통해 전달되었고 전화벨 소리에 깨어난 나 역시 짐작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생겼구나….
"형님, 접니다. 무슨 일이세요?"
"아, 동생! 미안하네. 빨리 좀 와줘야겠어. 아버지 대체 왜 그러신대? 짐싸서 나가신 것 같네. 좀와 줘야겠어"
할아버지께서…. 가슴이 뛰었다. 주체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뛰었다. 내 심장이 풍선이었더라면뻥소리를 내며 터질듯….
아빠는 대충 옷을 입으시고는 엄마와 동생과 나를 차에 태우시고선 핸들을 잡으셨고 불과 40분밖에 걸리지 않는 할머니댁까지 가는 동안 끊임없이 한숨을 내쉬셨다. 가족들 중 유일하게 나 이외에 할아버지를 끔찍히 위해 주시는 한 분…. 바로 아빠였기에…. 그런 아빠 앞에서 난 그 어떤 걱정도 말로 할 수가 없었다. 아빠의 걱정이 더 커질까봐…. 다만….
"아빠, 어디 바람쐬러 가셨겠죠. 걱정하지 마세요"
라는 말로 할아버지에 대한 나의 걱정과 아빠의 걱정을 꼭 묶어서 담아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었다.
도착하자마자 동생과 나는 어른들 얘기라는 핑계로 밖으로 쫓겨났다. 우리들 보기가 부끄러우셨던 걸까? 그렇지 않으면 곧 큰 소리가 터져나올 것을 예감하셨던 걸까? 원망이 그득 담긴 듯한아버지의 큰 목소리. 역겨운 변명의 냄새가 그득 배어 있는 큰아버지의 큰 목소리…. 싫었다. 귀를 손가락으로 꼬옥 막아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 역겨운 큰 소리를 묻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에 저 구석진 곳에 자리잡고 있는 할아버지방의 미닫이문을 드르르 열었다. 일부러 더 요란하게…. 열자마자 그 방에서 쑤욱 뱉어내는 할아버지의냄새…. 할아버지를 그렇게 좋아하고 따랐음에도 불구하고 평소엔 그리도 싫던 그 냄새가 나를눈물짓게 만들었다. 아니, 냄새 속에서 느껴지는 할아버지의 처지가 나를 눈물짓게 만든 것이리라.
할아버지, 나의 할아버지! 젊으셨을적, 인심좋고 성실하기로 온 동네 소문이 자자하던 당신께서는도박이라는 그물에 걸리게 되셨고 할머니께서 악착같이 모아놓으신 재산을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리셨다. 그래서 5남매는 가난이라는 조금은 생소한 고난에 허덕이게 되었고 그 고난의 깊이가 깊어짐에 따라 할아버지에 대한 미움도 커져갔던 것이었다. 그 마음은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커져버렸고 나이가 들어가면서도 좀처럼 작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할아버지께서 유달리 귀여워하셨던 나의 아빠…. 아빠만은 그렇지가 않으니 내가 조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는 것이리라. 아주 우습게도 할아버지에 대한 대우의 정도에 따라 내 마음 속 그 사람에 대한 나의 감정도 달라졌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아빠는 엉거주춤 할아버지 방 앞에 서 있는 나와 내동생의 손을 낚아채듯 잡고는 아무 말 없이 차에 몸을 싣게 했다. 그렇게 하루가 갔다. 이틀이 가고 사흘이 갔지만그렇게 시간이 흐른들 무엇하랴! 할아버지는 연락이 없으셨다. 아빠가 저녁 늦게 들어오실 때 나의 인사는 '이제 오세요'라는 말에서 '아빠, 할아버지는?'이란 말로 바뀌어 버렸고. 아빠에게만은연락을 하실 줄 알았는데…. 밤마다 두손을 꼭 잡고 무언가를 간절히 비는 것이 일과가 되어 갈즈음….
어느 날 학교 다녀오는 나의 눈을 의심케 하는 그 장면…. 커다란 가방을 하나 들고 꼬옥 잠겨진우리집 대문 앞에 초라하게 서 계시던 할아버지의 그 모습….
"할아버지! 어디 갔다 오신 거예요. 얼마나 걱정했다구요"
"그래. 이 할애비 걱정해 주는 손녀도 있고. 이 할애비는 참 행복하다"
난 열쇠가 없던 터라 봄볕이 잘 드는마당 한가운데 신문을 깔아서 할아버지를 앉게 해 드리고 얼른 슈퍼를 다녀왔다.
"할아버지, 이거! 좋아하시는거요"
나는 평소 할아버지께서 즐겨 드시던 막걸리가 불현듯 떠올라 사다가는 할아버지께 한 잔 드렸다.
"아이고, 우리 착한 손녀가 주는 거라 더욱 맛이 좋네"
집을 나가 계신 며칠 동안 고생하신 흔적이 역력했다. 너털웃음을 웃으시며 눈가에 잡힌 가느다란 주름사이로 번지는 눈물이 그걸 말해 주고 있었다.
"할아버지 그거 아세요? 제가 할아버지 무지 좋아하는것…"
난 그 동안의 어떤 일에 대해서는 말하고 싶지가 않았다. 왠지 그래야만겠다는 생각이 내 의식을붙잡고 있었기에…. 대신 일부러 재롱을 떨고 엉뚱한 말들을 해댔다.
"얘야. 이 할아버지가 재미있는 거 해주랴? 엄지손가락을 축으로해서 집게손가락을 돌려서 원을만들어 보려무나. 했니? 세상에서 그 원만큼만 빼고 이 할애비는 내 손녀를 사랑하지. 그리고 그원에는…. 너무도 착한 내 손녀에게 앞으로 다가올 힘겨움을 꼭꼭 눌러 담아서 이 할애비가 저멀리 갈 때 가지고 가련다. 이 할애비는 너무도 못난 사람이다. 열심히 살아서 나처럼 되지 말거라. 진실은 사람을 불편하게 하고 거짓은 사람을 흥분하게 만드는 법이다. 사람을 불편하게 할 정도로 진실하게 살 거라. 그리고 할애비가 너를 사랑하는 만큼 다른 사람을 사랑하거라. 그래야 부끄럽지 않게 살 수 있단다"
할아버지는 이 말을 하시고는 다녀가신 일을 비밀로 해 달라고 하셨다. 그리고는 가 버리셨다.그 후, 할아버지는 중풍이란 병으로 눕게 되셨다. 말씀이 없으시다. 안하시는 것이리라…. 세월이두려운 것이겠지. 기억이 난다. 무슨 무늬마냥 새겨진 할아버지 목 뒤의 주름…. 깊고 굵은 그 세월의 흔적….
부끄러울 수도 있는 그 흔적을 난 사랑하리라. 영원히….
슬프도록 아름다운 이 가을을 당신께서 느끼실 수 있길 바라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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