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제10회 매일여성백일장 최우수작(1)

"산문부문-세월은 눈으로 보인다" "누나, 초상날은 그 날만 초상날이지, 제삿날은 잔칫날이야. 돌아가신 어머니가 우릴 찾아 오시는날이니까"

지방을 쓰며 동생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슬픈 마음을 갖지 말라고 날 위로하는 게 아니라 일곱명의 누이들을 대표하여 제사상을 모셔야 하는 자기마음을 먼저 추스리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닐까. 그렇게 말하는 동생의 책상머리엔 유언처럼 두고가신 빨간 성경책 한권이 놓여있다.음력 9월8일, 그저께는 어머니의 기일이었다. 올해로 6주기가 된다. 우리 팔남매는 부산이며 경주며 각지로 흩어져 살다 바람끝이 차가워지기 시작하는 이맘때면 어김없이 어머니가 누워 계신 선산 사방골로 모인다.

세월은 몸으로 느끼기 전에 눈으로 먼저 보인다.

근 3년간의 투병생활 끝에 두고 간 삼남매는 제짝을 찾아 가정을 꾸렸고 외손주만도 일곱이 늘었다. 딸만 두어 늘 걱정하셨던 둘째언니는 당신 떠나신지 두달 뒤에 정말 떡두꺼비같은 아들을 낳았고 여고생이었던 막내도 배불뚝이 예비엄마가 되어 있으니 어머니가 두고 가신 6년의 세월이눈에 보인다.

"우리 주희, 용식이 잘 부탁해요, 엄마!"

고3, 중3 입시생이 둘이나 되는 큰 언니가 잔을 올리며 기원하는 손끝이 떨렸다. 이제 오십의 문턱에 들어서는 큰 형부도 그 기원속에서 세월을 느꼈을 게다.

어머니 속을 가장 많이 썩혔다고 스스로 인정하는 다섯째 언니! 신혼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거동못하시는 어머니의 병수발을 하며 그 빚을 갚았다.

어머니가 누워계신 병원에서 첫애를 낳으면서도 어머니가 아시면 같이 산고를 겪으실 거라며 혼자 이겨낸, 난산으로 태어난 아이가 이제 학교를 들어간다.

어렵게 얻은 아들, 재우의 투명한 눈빛에서 언니는 어머니가 두고가신 세월을 볼 것이다.잔을 차례로 올리며 수저를 함께 장만한 음식위에 고루 올려 놓았다.

"수박에도 올려라"

그 해 그 일을 아버지께서도 기억하시나보다.

투병생활내내 병원에서는 감염을 우려해 날음식을 먹지 못하게 했다. 무더운 여름에도 푸성귀는고사하고 과일 한쪽 드실 수가 없었다. 당뇨로 입원한 옆병상의 할머니는 연신 오이를 깎아드시고 수박을 맛나게 드셨지만.

어느 날인가. 시원한 수박 한쪽만 먹어 봤으면 좋겠다는 어머니말씀이 너무 안타까워 나는 냄비에 수박조각을 넣어 삶아 보았다. 살이 풀어져 흐물흐물해진 수박을 보시더니 기가 막혀서일까,당신의 현실이 서글퍼서일까 눈물부터 흘리셨다.

제철없이 나는 잘 익은 수박을 제사상에서라도 실컷 드시고 가시길 바라며 동생은 얌전하게 수박위에 수저를 올렸다.

상을 물리고 우리는 아버지의 오래된 앨범을 정리했다. 흑백사진 속에 어릴적 우리 팔남매가 살아있었다.

한겨울인데도 아래가 터진 내복을 입은 남동생은 고추를 드러내 놓고도 해맑게 웃고 있었다. 딸여섯을 낳고 얻은 종손이라 동생이 태어나던 날 밤에 시골집 담위엔 촛불이 밤새 환하게 켜져 있었다 한다. 어머니는 누구보다 그 아들이 자랑스러우셨을 게다. 사진 속에 있는 밑터진 내복을 얼마나 입혀보고 싶으셨을까.

막내는 집에서 자른, 까만 도토리 뚜껑같은 머리모양을 하고 오촌아저씨가 일본에서 보내온 낡은옷을 입고도 뭐가 그리 좋은지 큰 앞니 두 개를 드러내고 있었다.

언니들의 결혼식 사진속에서 만나는 어머니는 하나같이 서러운 눈빛에, 덩그렇게 앞이 들린 촌스런 한복차림이셨다.

마지막 여행이 되고만 제주도 여행사진에서도 어머니는 우리가 입다 버려둔 싸구려 옷을 입고 배경이 된 성산일출봉에 바다보다 더 허허로운 웃음을 웃고 계셨다. 빨간 잠바에 청바지, 멋지게 등산모까지 눌러쓴 동네 아주머니들속에 끼어 서계신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땐 팔남매가 모두 자란 후인데도 우린 왜 예쁜 옷 한 벌 못해 드렸을까.

난생 처음 어머니는 아버지께 모시저고리를 선물 받으셨는데 그 옷조차 한번도 걸쳐보지 못하고당신의 관을 채우는 보공(補空)이 되고 말았다.

어머니의 기일이 있는 10월은 1996년, 97년하는 서기연도보다 5주기, 6주기하며 세월을 읽는데 익숙해있다.

돌이켜 짚어보니 지금의 내 나이는 어머니가 나를 낳아주시던 그 때 어머니의 나이다. 2개월전에태어난 둘째아이처럼 나도 축복받지 못하는 여섯째딸로 그렇게 태어났을게다. 하지만 어머니는천덕꾸러기 여섯째딸이 아닌 건강한 여자로 부끄럽지 않게 키워주셨다.

결고운 가을햇살속에 해맑게 웃는 아이의 미소를 보며 어머니가 키워주신 서른 몇해의 세월보다우리에게 주고가신 앞으로의 세월을 더 알차게 꾸려 보리라 다짐해본다. 어머니가 두고 가신 지난 6년의 세월이 그렇듯 세월은 흘러 그냥 묻히는게 아니라 살아 남아보이는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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