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차가운 돌에 담긴 뜨거운 문학혼

가을이 깊어 낙엽이 뒹구는 계절. 문학비를 찾아 나서는 일은 생과 사랑, 죽음의 영원한 테마를가슴속에 다시 새겨넣는 순례길이다. 상화, 청마, 육사, 목월, 지훈…. 그들은 떠났지만 그의 시가남고 그의 혼은 문학비로 남아 지난 추억이 그리 슬프지만은 않다.

비록 차가운 돌이지만 그가 남긴 시와 글이 있음으로 비(碑)는 오히려 따뜻하다. 그래서 순례길에나서는 나그네들은 누구나 차분한 마음으로 삶을 되돌아 보게 된다. 간혹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이슬은 내 맘속에 있네...'처럼 지난 시절의 아련한 노래선율이 조용히입가에 맴돈다면 먼 길도 오히려 낭만이다.

강원도 화천 파로호부터 제주까지 전국에 산재해있는 문학비는 모두 3백50여기. 그중 3백여기가시비(詩碑)다. 대구경북지역에 세워진 문학비는 노계 박인로(朴仁老)의 시비등 고전시비를 포함해 모두 20기 남짓. 대구에는 상화시비를 비롯 앞산공원의 이호우시비와 두류공원내 현진건문학비, 고월 이장희시비, 백기만시비와 가창면 정대리 김원도시비등이 서 있다.

48년 3월 달성공원에 세워진 최초의 근대적 문학비인 상화시비는 우리나라 문학비의 효시로 자리매김되고 있다. 식민지시절 울분과 고통이라는 조선병을 앓다 간 상화의 뜨거운 입김이 '나의침실로'라는 시구로 남은 상화시비. 이즈음에도 누군가 함초롬이 놓아둔 꽃송이는 '아 어린애 가슴처럼/세월 모르는 나의 침실로/가자 아름답고 오랜 거게로'를 외치는듯 하다.이육사와 조지훈의 시비를 찾아 나서는 길. 늦가을 해가 짧다. 92년 육사의 생가터에 세워진 시비는 길목에 도산서원과 퇴계묘, 종택이 자리잡고 있어 유서가 깊다. 안동시 도산면. 안동외곽의35번국도를 접어들어 도산서원 입구에서 춘양쪽으로 3Km남짓 가다보면 도산면사무소가 보인다. 면사무소 앞에 난 다리를 건너기 직전 오른편길로 접어들면 보이는 팻말을 따라 퇴계종택2.6Km, 육사시비 5.3km. 맑은 개울을 따라 좁게 난 길이 불안하지만 차창밖 풍경은 한 폭 그림이고 그리운 자연의 내음이다. 청량산을 휘돌아 안동댐으로 흘러내리는 물이 갑자기 넓어질 무렵언덕아래 육사의 생가터와 시비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의 시비에는 '내고장 7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로 시작되는 '청포도'가 육사의 브론즈얼굴부조와 나란히 새겨져 있다. 육사의 생가는 동네가 안동댐 수몰지역이 되는 바람에 안동시태화동으로 옮겨 세워졌지만 육사의 6형제 우애를 기리는 당호 육우당(六友堂)을 따 육우당유허지비가 시비옆에 건립돼 있다.

이곳에서 차로 넉넉잡아 1시간이면 영양군 일원면 주곡리 조지훈의 향리에 닿는다. 주실로 불리는 이 곳은 2백50년 묵은 느티나무가 마을앞을 지키는 물맑은 고향이다. 조선시대때는 매계(梅溪)로 불리던 곳. 마을앞은 맑은 장군천이 흐르고 동네입구에는 82년에 세운 지훈의 시비가 지조높은 선비의 기품으로 서 있다. 슬픈 구름 걷어가는 바람이 되라는 지훈의 시 '빛을 찾아 가는길'을 읽노라면 사슴이랑 이리함께 산길을 걸으며 바위틈에 어리우는 물을 마시는 지훈의 맑은그림자가 시비에 어린다.

이밖에 목월시비가 경주 보문단지내 홍도공원에 건립됐고 청마 유치환의 시비는 경주 불국사 석굴암 등산로에 서 있다. 또 영일군 송라면 내연산 보경사에 는 한흑구 시비가, 소설가 백신애의문학표징비는 고향인 영천시 문화원뜰에 자리잡고 있다. 이호우 이영도 남매시조시인의 시비가청도군 유천리 생가터에, 오일도시비가 영양군 영양읍 감천1리에, 고유섭의 시비가 월성군 감포읍대본리에 각각 건립돼 있다.

상화시비가 세워질 무렵 건립에 주동이 된 김소운의 말은 참으로 명쾌하다. "상화시비가 선례가 되어 시비를 세우려는 사람이 많아지면 달성공원은 시비 천지가 될 것"이라는 대구시장의 걱정에 소운은 "달성공원에 시비 세 개만 서는 날이 온다면 이 나라는 만만세입니다"라고 응수했다. 그후 50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달성공원에는 상화시비만 외롭게 서 있어 두 사람의 말은 모두 빗나가고만 셈이다.

〈徐琮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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