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연예인 팬클럽

김밥(담배) 먹고 뻥튀기(머리를 크게 부풀려 보이는 파마) 하고 자랑스럽게 보트(발 크기보다 훨씬 큰 농구화)를 질질 끌고 다니는 10대들의 세계. 그 속에도 '문화'란 게 있을까?가늘게 치켜 뜬 어른들 눈에는 그저 적극적으로 촌스러움을 연출하는 아이들의 '유행'만 들어온다. 바야흐로 유행은 '깻잎 머리'(핀으로 앞머리카락을 찰싹 붙여 차곡차곡 포개 올린 것)를 지나이제는 '뻥튀기'로 가고 있는데….

"왜?"라는 다그침에도 "그냥요"라는 대답만이 공허한 아이들의 문화. 그 속으로 직접 들어가 본다.

지난달 25일 오후 7시 대구실내체육관. 요즘 '잘 나간다'는 가수들이 무대에 오를 '슈퍼스타 페스티발'이 시작되기를 기다리며 아이들이 1·2층 관람석을 가득 메웠다. 스탠드 뒤에 쭈그리고 앉아 컵라면을 먹는 아이들. "학교 끝나고 바로 뛰어 왔거든요"

23시간 전. 댄스그룹 '젝키'의 팬클럽 회장 은영이(19)와 부회장 효춘이(18)는 '좋은 자리'를 잡기위해 미리 왔었다. 공연이 있을 때 밤새워 기다리는 일 쯤 아무것도 아니다. 이례적으로 '아무도없었던' 이날의 기다림은 새벽 1시에 끝났다. "표 구하려고 경주, 포항, 영주, 김천까지 싹 뒤졌는데 글쎄 아무데도 없고 차비만 날린 거 있죠?"

공연장에서 젝키 팬클럽은 단연 빛났다. 자랑스럽게 '젝·생(生)·젝·사(死)'(젝키로 살고 젝키로죽는다)라고 새겨 넣은 빨간색 유니폼. 저마다 풍선을 흔들며 "젝키 짱(최고)! 젝키 짱!"을 연호하는 응원도 다른 팬클럽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

몇날몇일 밤잠을 설쳐가며 기다려왔던 공연. 젝키는 4곡의 노래를 부르고 20여분만에 무대에서내려왔다. 아이들은 무엇으로 보상받았을까?

"밤늦게 싸돌아 다닌다고 아빠한테 '장난 아니게' 맞은 적도 있지만 공연만은 볼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어요. 성훈이의 개다리춤, 너무 멋져!" - 연희(18).

"같은 가수를 좋아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모르는 사람끼리도 마음이 통하는 친구가 될 수 있어요. 그게 중요해요" - 순경(21).

젝키팬클럽 회원들이 뿌듯한 마음으로 돌아간 뒤에도 임창정 팬클럽 '빠빠라기' 회원들은 한동안멍하니 자리를 지켰다. 임창정이 끝까지 무대에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날짜를 확인하려고수업시간에도 몰래 라디오를 들으면서 콘서트를 기다려왔는데…" 빠빠라기 회장 미경이(18)는 책임감에 어깨가 더 무거웠다.

그러나 이튿날 다시 만난 미경이와 은영이(18)의 얼굴에는 다시 웃음이 가득했다. "오빠(임창정)가 전화사서함에다 비행기 결항때문에 못 와서 미안하다고 메시지를 남겨 주셨어요. 아무렴 몸이아파 쓰러져도 무대에만 서면 열창을 하는 오빤데요"

팬클럽 아이들을 만날 때마다 왜 그 연예인을 좋아하냐고 물어 보면 이상하게도 대답은 한결같다. "'스타'라는 부담감을 안 줘요. 참 인간적이고 편안하다는 느낌이 들어요" 콧대 높은 가수는한명도 없나? 그럴만도 하다. 팬클럽은 가장 확실한 음반구매자이자 걸어다니는 광고판. 전화집계로 순위를 결정하는 방송사 가요프로그램에서 1위 후보라도 되면 전국의 팬클럽회원들이 조직적으로 전화기에 매달린다. 요즘 인기절정인 H·O·T의 경우 공식 회원수만 전국에 1만5천명. 이들 앞에서 과연 콧대를 높일 수 있을까. 몇 개 팬클럽을 한꺼번에 '관리'해주는 대행사까지 생긴요즘, 팬클럽은 한국적 '스타 시스템'의 일부가 됐다. '클럽 H·O·T' 회장인 영미(19)의 말이 어른스럽다. "실제로는 아닐 수 있지만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착하게 보이는거죠"웃어야 하고 착해야 하는 연예인 생활. 아이들도 잘 알고 있다.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팬클럽 아이들은 그속에서 스스로 규칙을 만들고 질서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다. 아이들의 말속에 공통적인 것이 또 있다.

"오빠한테서 답장이 왔을 때, 내 이름을 불러줬을 때, 나를 알아봐줬을 때 제일 기뻤어요"자신을 인정해줄 누군가를 늘 그리워하는 아이들. '존재의 가치' 따위 어려운 말이 싫은 그들에게따뜻한 '오빠'가 되지 못하는 어른들.

"공연때마다 울어요. '줄을 잘 서면 자리를 정해 주겠다'느니 약속만 번지르르 해놓고는 결국 '웃기는 애들'이라며 무시해버리는 어른들 땜에요" - 은영(19)

"한반에 58명씩이나 들어가있어도 겨울이면 코가 어는데 교무실에 가보면 땀나게 더워요. '청소년보호법'이다뭐다 말로만 떠들지 말고 진짜 우리를 위해서 뭔가 해줬으면 좋겠어요" - 연희(18)."지금 어른들한테 한 얘기, 꼭 좀 신문에 실어주세요" - 효춘(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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