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이 지난 7월1일을 기해 중국에 회귀했다. 영국의 식민지배를 받은지 1백56년만에 제자리를 찾은 것이다.
이날 0시 정각, 홍콩의 컨벤션 센터 그랜드 홀에서 열린 주권 반환식 행사는 중국의 국가인 '의용군행진곡'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오성홍기와 홍콩특별행정구(SAR)기를 나란히 게양, 천하에 홍콩의 중국 반환을 알렸다.
그 1분전에는 유니언 잭과 홍콩 정청기가 영국 국가 '신이여 여왕을 보호하소서'가 연주되는 가운데 하강돼 영국의 식민지배 종식과 함께 서구 열강이 아시아를 지배해온 서세동점의 역사에 종언을 고했다.
근세사를 얼룩지게 한 제국주의는 제2차세계대전이후 탈식민지화로 서서히 몰락해왔지만 홍콩 회귀로 그 잔재가 완전히 청산됐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은 청조의 아편전쟁 패배로 1842년 홍콩을 할양한 아픈 역사를 마감했다.
중국은 지난 49년 대륙을 공산화하면서 홍콩을 접수할 기회가 여러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99년간의 조차기간이 끝나는 이날을 기다려왔다. 그 준비작업은 지난 84년 영-중 공동선언이 나온 뒤13년간을 끌었다.
이로써 홍콩은 중국의 일국양제(1국가2체제)와 고도자치 준수 및 인권과 자유의 보장 다짐속에 중국의 특별행정구로 새롭게 출범했다. 일국양제란 중국이 외교와 국방만을 책임지고 SAR에 행정과 입법, 사법의 독립성을 보장하는 것을 뜻한다.
당초 대만과의 통일을 겨냥해 만들어진 이 원칙을 홍콩에 50년간 한시적으로 적용키로 한 것은중국의 경제력이 아직 선진국 수준에 미달하는데다 홍콩이 국제경제에서 갖는 지위를 위축시키지않으려는 실용적 판단이 작용한 결과다.
홍콩은 사상 초유의 일국양제 원칙에 따라 앞으로 50년간 기존의 사회 및 생활방식, 그리고 시장경제체제 유지를 골자로 하는 '홍콩인에 의한 홍콩 통치'(港人治港)를 구가하는 새로운 시대에 돌입했다.
그 주축은 홍콩특별행정구(SAR) 정부다. 5년임기의 동건화 초대 행정장관과 각료들, 임시입법회(의회) 위원, 종심법원(대법원)의 판사들이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가 혼합된 일국양제의 성패를 가름할 실험을 이끌게 된다.
중국 지도부가 동행정장관을 의전상 국무원 부총리급 이상인 영도자급 반열에 포함시킨 것은 북경 당국이 홍콩에 쏟는 관심과 기대가 매우 크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한편 북경 당국은 외교의 큰 틀에 대해선 외교권을 행사하지만 조약체결권을 포함해 어지간한 사항에 대해선 위임 형식으로 특구에 맡긴다는 원칙이 세워져 있다.
중국은 일국양제와 항인치항이라는 원칙으로 영국측과 홍콩 주민의 반환 동의를 얻어냈다. 그러나홍콩에서 경제만 배울 뿐 정치는 배우지 않겠다는 것이 일국양제의 숨겨진 뜻이며 홍콩특별행정구가 갖는 한계다.
홍콩은 현재 중국의 최대 교역대상임과 동시에 대외무역의 창구 역할을 하고 있다. 그래서 중국경제와는 입술과 이빨(脣齒)의 관계라는 평을 받는다. 중국 당국은 홍콩을 품에 안음으로써 이를대중화 경제권 건설로 연결시킨다는 꿈을 꿀 수 있게됐다.
그러나 중국식(中國式) 정치문화가 홍콩의 시장경제를 제대로 뒷받침할 수 있을지는 예단하기 어렵다. 오늘날의 홍콩을 있게 하는데 주춧돌이 돼온 공정한 게임의 룰이 중국측의 통제로 억제되면경제의 기반이 위축될 가능성이 크다.
지나친 개입과 공무원의 중립성 붕괴 및 부패의 전염, 권력구조의 분산이 이곳의 정치적 장래에대한 비관론의 요인들이다. 민주화와 인권도 중국 정부 수뇌들이 지나치지 않다고 판단하는 범위로 묶여져 있다는 것이 민주세력의 비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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