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만수 나의 야구인생-5

당시의 관례대로 나는 1학년을 두번 보내고 2학년이 돼서야 드디어 주전으로 발탁됐다. 처음 포지션은 야구에서 제일 못하는 선수가 으레 맡는 우익수였다.

이때부터 나는 '독종'외에 '번트 리'라는 별명을 하나 더 갖게 됐다.

이 별명은 말 그대로 타석에 들어서면 번트만 댄다고 선배들이 붙여준 것이었다. 프로선수가 된뒤에는 번트를 거의 대지 않았지만 당시에는 번트의 귀재로 불렸다.

번트때문에 나는 첫 출전한 대회에서 결승점을 올리며 우승의 1등 공신이 되기도 했다. 내가 중2때 여름 우리팀은 포항시장기 중학교야구대회 결승에서 포항중과 만났다. 당시 포항중 투수는 김시진이었는데 9회까지 우리가 4대3으로 뒤지고 있었다.

마지막 9회 공격 노아웃 2루에서 내가 타석에 들어섰다. 주자를 진루시키자는 생각에서 투수앞으로 번트를 살짝 댔는데 이게 내야안타가 됐다. 그런데 김시진이 볼을 잡아서 1루로 던진다는 것이뒤로 빠져 러닝 홈런으로 기록되며 2점을 뽑아 역전승을 거뒀다.

이 대회이후 나는 '덩치가 크다'는 이유로 포수에 낙점 됐다. 그러다가 야구부장이던 구수갑 선생님이 투수의 컨트롤이 좋지않은데 네가 던져봐라 고 한 것이 계기가 돼 또다시 투수로 전향하게됐다.

2학년말부터 나는 기량이 급성장해 각종 타격상을 휩쓸며 3개 대회 우승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또 홍승규 양일환등 후배들과 함께 투수로서도 활약해 문교부장관기에서는 우수투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투수는 매일 1백50개 이상의 피칭 연습을 하도록해 팔이 굽고 허리 통증을 견딜수 없어도저히 못하겠다 고 버틴 끝에 3학년 말에 가서야 다시 포수로 복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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