넓은 유리문으로 새벽의 희미한 빛이 내려앉기 시작한다. 빛은 서서히 거리의 어둠을 밀어낸다. 대각선 무늬로 연결된 보도블록 위로 사람들이 걸어가는 것이 보인다.형광등 불빛은 밤의 캄캄한 어둠과는 상관없이 정방형의 실내 진열대에 배열된 물건들을 밤새도록 비춘다. 24시간 편의점이라는 특성때문에 낮과 밤이 바뀐지 다섯달이 되어간다. 지난 겨울부터 낮근무보다 급료가 많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밤 근무를 자청해야 했다. 창가 바로 옆의 자리에 있는 카운터로 걸어간다. 카운터에 달린둥근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유리문 밖의 거리 풍경을 바라본다. 무심코 바라보게되는 이태원의 거리는 아직은 한적하다. 편의점 건너편에는 C호텔, 쇼핑센터, 맥주광장, 원색의 간판과 장식으로 장식한 패스트푸드점, 옷가게, 지하로 연결된 나이트클럽, 노래방들이 밀집되어 있다.
버스보다는 택시가 많이 다니고 중형 택시와 외제 자가용이 뒤섞여 다니는 이 차선도로는 밤이면 네온사인의 불빛이 빨갛게 반짝인다. 밤의 풍경은 어릴적 수인과 놀러갔던 공원의 놀이 동산같다. 이태원 거리의 화려한 불빛은 저녁이 되어도 멈추지않는 풍차나 청룡열차, 꼬마전구를 색색으로 달아놓고 돌아가는 회전목마를 연상시킨다. 거리를 점거하는 사람들은 놀이기구에 앉아 시간가는줄 모르고 집에 돌아갈생각을 하지 않는 아이들의 모습이다.
편의점 유리문 정면으로 보이는 C호텔의 둥근 회전문이 돌아갈 때마다 나는 나도모르게 그곳에 출입하는 고객들의 옷차림이나 행동들을 훔쳐보는 버릇이 생겼다.그것은 이 편의점에서의 나의 일이 단순한 일에 대한 무료함이라기 보다는 이 화려하고 향락적인 동네에 기생하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생활 형태에 대한 호기심이기때문이다. 나는 C호텔 주차장에 세워진 차들을 눈으로 세어보거나, 호텔 회전문 앞에 벨보이의 동작을 유심히 관찰하기도 한다. 지하철 출구로 나오는 사람들의 표정이나 버스 정류장 앞의 모습들을 바라보는 일은 어느새 세상 사람들을 투명한 편의점 유리창으로 들여다보는 습관에 길들여져 버렸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은 한국사람보다는 백인과 흑인, 그리고 그들과 어울리는 한국 여자들이 많다. 내가 앉아있는 카운터 바로 옆 오른쪽 벽면의 진열대에는 냉동식품, 패스트푸드. 음료가 차곡차곡 진열되어 있고, 카운터 맞은편에는 스낵류, 유제품, 주류가 품목별로 분류되어놓여있다. 천장 끝에서 얼마간의 간격을 두고 그어진 붉은 줄로 만든 칸에는 각 품목이 고딕체로 새겨져 있는데, 나는 진열 품목이 만들어놓은 물건들의 질서를 거역할 수 없다. 그래서 이 편의점의 규격품과도 같은 사물의 질서에 자연스럽게 적응할 수 있었다. 유리문이 열리며 챙모자를 쓴 신문 배달하는 아이가 들어온다. 손님많았어요? 하며 카운터 위에 일간지와 스포츠신문을 툭 던져놓고 나간다. 신문배달하는 아이가 매일 퉁명스레 건네는, 손님 많았어요? 라는 인사말은 나의 긴 밤노동이 끝났다는 신호음이기도 한다. 이 동네는 낮보다 밤 손님이 많다. 주택가보다는외국인들의 쇼핑거리로 유명한 이태원이라는 동네의 특수성과 외국인 전용의 유흥업소가 많기 때문이다.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 속에 띄는 것이다. 나는 신문을 두손으로 모아 스낵류 옆 칸에 있는 신문 가판대로 갔다. 어제 남은 신문을 걷고 그자리에 신문을 반으로 접어 밀어넣는다. 신문 아래칸에는 일반 잡지가 꽂혀 있고,그 아래칸에는 성인용 만화잡지가 일렬로 진열되어 있다. 제일 잘나가는 잡지의 부수를 점검한다. 표지 속의 여자가 웃고 있다. 속옷 차림의 여자가 타원형으로 입술을 벌리고 있다. 만화잡지 옆에 '컬러즈'라는 제목의 베네통에서 발간하는 잡지를꺼낸다. 잡지 표지에는 밤꽃이라는 치모가발이 실려있다. 아무리 금기를 깨기 위해존재하는 광고로 유명하기는 하지만 치모로 가발을 만들다니. 이번 호의 주제는 '호사'다. '호사'를 주제로 한 컬러화보는 애완견 두 마리가 바닷가의 비치 파라솔아래서 모래찜질을 하고 있는 사진이다. 스트레스를 치료받기 위해 일본 규우섬에서 40도의 화산 모래로 찜질을 하는 애완동물이라는 설명이 붙어있다. 그 아래칸에는 적외선 센스가 부착돼 자동으로 물이 나오는 1백50만원짜리 고양이 자동 변기가보인다. 변기의 색깔이 광택이 나는 금빛만 아니었어도, 직사각형의 변기위에 다소곳이 앉아있는 고양이의 은회색 털만 아니었어도 난 무심코 페이지를 넘겼을 것이다. 여름이든 겨울이든 바닷가를 한 번도 걸어 본 일이 없고, 집 안에 아직까지 수세식 화장실을 사용해 본 일이 없는 나로서는 두마리의 개와 고양이가 괴기하기 보이기까지 했다.
이거 계산해주세요. 노란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담배와 술을 들고 카운터 옆에서나를 기다린다. 나는 잡지를 가판대에 다시 비치해놓고 종종걸음으로 걸어간다. 거무잡잡한 피부에 긴 머리카락, 광대뼈가 불거져나온 낯이 익은 얼굴이다. 매일 비슷한 시각에 담배와 술을 사가는 여자다.
"혹시 수면제는 없어요?"
이 여자는 이상하게도 편의점에서 없는 물건만 찾는다. 생리대를 살때는 진통제 없어요 묻고, 수면용 안대나 수입향수를 찾기도 한다. 여자가 지갑에서 돈을 꺼내려눈을 내리깐다. 눈 밑이 검은 띠를 두른 것처럼 그늘이 져 있다. 여자가 내미는 물건을 계산해주며 손목시계를 보니 낮 근무인 김군과의 교대 시간이 한시간 남아 있다. 걸레를 들고 식품 냉장고 옆에 있는 타원형 간이 식탁을 닦는다. 식탁에 듬성듬성 라면 국물과 고춧가루가 떨어져 있다. 지배인 장씨의 잔소리를 듣지 않으려면교대 시간 전에 청소를 해 놓아야 한다. 아침에 수금을 하러 들르는 장씨는 물건이제 자리에 놓여 있지 않거나 청소가 되어 있지 않으면 잔소리를 늘어놓다가 사람을갈아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걸레로 식탁 위의 얼룩을 문지르고 먹고 버린 사발면 용기가 가득 찬 쓰레기통을 비운다. 면발 찌꺼기가 든 비닐 봉투를 벗겨놓고새 비닐을 씌우고 있을 때 수송차가 들어서는 것이 보인다.
잠바 차림의 기사가 어묵과 소시지를 한아름 들고 들어온다. 나는 소세지와 어묵을식품 냉장고로 옮기고, 스테인리스 열수통 옆에 사발면을 차곡차곡 쌓아놓는다. 나의 아침 일은 수송차가 운반해주는 물건을 제자리에 분류해 놓는 일이다. 그리고또 한 가지. 천장에서 15도 각도로 걸려 있는 감시용 화면을 보는 일이다. 나는 계산을 하다가도 가끔 고개를 들어 감시용 화면을 응시한다. 처음 이 편의점에서 일하기 시작했을 때 지배인인 장씨는 나에게 물건을 분류하고 계산하는 일과 더불어,감시 화면을 동시에 주의깊게 바라보는 훈련을 시켰다. 이 동네는 불량스러운 아이들이 많아 그들이 가방이나 주머니에 물건을 슬쩍 갖고 나가는 일이 많다는 것이다. 특히 머리에 염색을 노랗게 물들인 여자 아이나 바지춤을 허리께까지 내린 힙합 바지를 입은 흑인 아이들이 떼거리로 가게에 들어오면 유심히 잘 살피라는 것이다. 나는 아무튼 지배인 눈에 잘 들어야 한다. 지배인은 조금만 맘에 들지 않으면아르바이트생을 갈아치운다고 김군이 일러주었다. 6개월은 더 다녀야만 휴학한 학교의 등록금을 마련할 수 있다.
조금 있으면 아침 손님이 한꺼번에 몰려들 시간이다. 아침 식사를 하지못한 샐러리맨들이 컵라면이나 샌드위치를 먹으러 올 것이고, 간밤에 먹은 술로 아픈 속을 달랠 숙취용 음료를 사러 올 것이다. 문이 열리며 단발머리를 한 여자 아이가 검은배낭을 한쪽 어깨에 둘러메고 들어온다. 아침 이시간마다 오는 손님인데 늘 같은모습이다. 자그마한 체구에 어울리는 검은색 가방이 조금 처량맞게 외소한 어깨에매달려 있다. 난 저 아이가 오늘도 아침을 이 곳에서 컵라면으로 때울 것을 안다.단발머리 아이는 내 앞을 지나 스낵용품이 진열되어 있는 칸으로 간다. 나는 아이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거두어 카운터 맞은편 천장에 걸려있는 감시 화면으로 시선을 옮긴다. 화면속에 아이는 전기 열수통 옆에 쌓여있는 사발면 용기를 집어 열수통의 꼭지를 앞으로 잡아당겨 뜨거운 물을 받아놓는다. 간이 식탁에 사발면을 갖다이의 모습을 놓치지 않는다. 저 아이가 가고 난 다음에는 주류류에 진열되어 있는양주 한 병이 비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짐작뿐이겠지만 양주의 갯수 정도는 파악하기 쉬운 것이었다. 제일 의심스러운 것은 계산을 치르고 가는 아이의 어깨에 매달린 검은 배낭의 부피가 들어올 때와는 달리 크게 부풀어 있다는 것에 있다. 그러나 한 번도 그 아이가 사발면의 값을 치를 때, 아이의 배낭을 풀러보자고 말할 용기가 나지 않는다. 여자 아이의 검은 배낭에서 용량 2백50㎖의 갈색 스카치 위스키병이 나오지 않는다면 난 저 아이에게 주게 될 상처를 감당 할 수 없기 때문이다.내가 유일하게 추적할 수 있는 길은 감시 화면으로 아이의 행동을 관찰하는 일뿐이다.
이번에는 놓치지 않을 생각이다. 나는 감시용 화면에 시선을 집중한다. 여자는 나무젓가락을 두 손으로 벌려 면발을 휘젖고 있다. 화면에 비친 여자의 얼굴은 면발을삼킬 때마다 볼이 탱탱해진다. 사발면을 먹고 있는 아이의 시선은 계속 술병이 진열되어 있는 곳에 가 있다. 그 때 문이 열리며 지배인 장씨가 들어온다.
"유리창 좀 닦어, 밖에서 보니까 볼 수가 없다. 이 얼룩들 좀 봐"
지배인은 언제나 반말이다. 나이도 많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데 이태원 시장 바닥에서 미제장사하여 돈을 번 부모 덕에 이 동네에 가게를 몇 개 가지고 있다. 금고에서 현금을 세기 시작한다. 돈을 세는 그의 손가락이 민첩하다.
"요새 재미가 별로 없어. 조금 있으면 할인 매장이 생긴다는데 이러구서야 원"그는 담배를 물며 신문 가판대로 간다. 일간지를 보다가 성인 잡지를 들척거린다.그 때 유리문이 열리며 여학생 다섯이 들어온다. 웃음소리가 경쾌하다. 그들은 각각물건들을 고르려 흩어진다. 나는 흘깃 화면을 곁눈질한다. 화면 속에 여자 아이는사발면 용기를 들어 국물을 마시고 있다. 여학생 하나가 화장지와 우유를 카운터앞에 놓는다. 화장지에 스캐너를 대는 순간 나머지 여학생들이 줄을 선다.
"빨리 계산해줘요"
나는 기계적으로 스캐너를 찍어댄다. 그때 아이의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들려온다.지배인이 라면을 먹던 단발머리 아이의 머리카락을 낚아챈다.
"이 나쁜 년, 세상에 할 일이 없어서 아침부터 도둑질이냐?"
장씨는 단발머리 아이를 바닥으로 내동댕이친다. 계산대 앞에 줄을 섰던 여학생들이 그녀 주위에 모여든다. 아이의 입술 끝으로 피가 흐르고 먹다남은 사발면의 국물이 그녀의 옷을 적시고 있다.
"쟤는 우리 학교에서 작년에 퇴학맞은 아이 아니야"
주위에 모여있던 여학생 중에 하나가 소리를 지른다. 바닥에 떨어진 여자의 검은배낭은 끈이 풀어져 주머니가 열려 있다. 그 벌어진 사이로 갈색 스카치 위스키병이 반쯤 삐져나온 것이 보인다.
집으로 가는 오르막길은 바람이 차다. 늘 이 오르막길을 오를 때면 불어오는 바람을 피하려 나도 모르게 턱을 가슴께로 바싹 끌어당기게 된다. 골목 끝에 보이는 대문은 반쯤 열려 있다. 여섯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다세대 주택 대문을 들어서면 안쪽 바닥에 우편물이 쌓여 있다. 나는 우편물을 주워 하나 하나 수신인 이름을 확인한다. 신림동 고시원에 있는 그에게는 아직 연락이 없다. 연락을 자주 띄우는 그는 아니지만 대문을 들어설 때마다 그에게로 온 편지가 혹은 다른 집으로 간것은 아닌지 우편물을 확인하게 된다. 그의 이름이 적힌 편지는 없다. 그대신 수인이 보낸 우편 엽서가 눈에 띈다. 이번 주에 떠나. 그 안에 한 번 들릴께, 수인. 검정볼펜으로 휘갈겨 쓴 글씨다.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옆에 조그마한 텃밭을 지난다. 텃밭에 3층의 주인 여자는봉숭아와 백일홍을 심었다. 작년에는 상추를 심었는데 장마비에 다 파헤쳐진 것 있지. 하지만 이렇게라도 흙을 만질 수 있는 곳이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야. 꽃씨를 심던 날, 주인 여자는 모종삽으로 잔돌을 골라가며 말했다. 주인 여자가 꽃씨를 심는다고 마당에서 수선을 피우던 그 날도 엄마는 방 안에서 나오지 않았다. 봄이 찾아와도 엄마는 밖에 나올 줄 모른다. 여섯 세대가 같이 쓰는 화장실에 가는 것과 병원에 가는 일 외에는 외출을 하지 않는다. 엄마의 늦잠은 계절이 없다. 엄마는 낮과밤의 구별이 없는 신생아 같다. 열쇠를 땄다. 언제부터인가 엄마의 낮잠을 방해하지않으려는 습관이다. 둥근 손잡이는 쉽게 돌아간다.
군살이 비죽이 드러나 보이는 엄마의 뒷모습이 보인다. 문 여는 소리에 오므린 다리가 반사적으로 움찔거린다. 눈썹 선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이마는 주름이 그득하다. 나는 수인이 보내 온 엽서를 엄마의 머리맡에 놓는다. 수인을 기다리든지말든지 그것은 엄마의 자유다. 내가 없는 시간에 수인이 왔으면 하는 바람 말고는없다. 목이 마르다. 나는 조용히 부엌으로 나가 냉장고 문을 연다. 냉장고 문에는붉은색의 갈래 머리를 한 여자 아이의 사진이 비스듬히 붙어 있다. 엄마는 냉장고를 여닫을 때마다 수인을 보고 싶은 걸까. 처음에는 수인의 사진 옆에 군인 복장을한 남자의 사진이 나란히 붙어 있었다. 수인의 머리칼 색깔과 똑같은 머리카락에모자를 쓰고 웃는 백인 남자의 사진이었다. 제발 이 남자의 사진은 이 집안에 보이게 하지 마, 엄마. 나는 그 사진을 뜯어내 바닥으로 내던지며 말했다. 그 이후로 그남자의 사진은 집 안에 보이지 않았다. 냉장고 맨 아래칸의 물병에 물이 조금 남아있다. 컵에 물을 따른 후 얼음 한 조각을 넣는다. 유리잔에 얼음이 원을 그리며 돌아다닌다. 방으로 돌아와 문갑 속에 세 번째 서랍을 연다. 사각 편지봉투가 겹겹이포개져 있다. 발신인 고시 육 년째에 접어든 그의 이름을 입 속으로 천천히 읽어본다. 그가 고시 합격증을 받기까지 앞으로 몇 년을 더 고시원에서 보내야하는지나는 모른다. 이제는 그만 두어야한다고 어떤 식으로든 말해야한다. 잠을 자야겠다.엄마 옆에 누웠다. 엄마의 긴 호흡이 얼굴에 닿는다. 비행기 소리가 들린다. 순간엄마의 오무린 다리는 니은 자 모양으로 벌어진다. 치마가 허벅지 위에까지 말려검은 반점들이 보인다. 살이 오목하게 타들어간 자리에 호두 알처럼 작은 주름이겹겹으로 뭉쳐져 있다. 담뱃불로 지진 자국이다. 저 자국을 볼 때마다 연민보다는엄마가 사라졌으면 하는 생각을 한다. 수인이 어느날 아침 엄마와 내 눈 앞에서 갑자기 사라진 것처럼. 잠을 잘 때나 밥을 먹을 때도 엄마의 매무새는 일부러 저 상처를 드러내려는 것마냥 풀어져 있다. 저 불에 그을린 자국은 엄마의 훈장이다. 난몸을 태워가며 험악스런 군발이 놈들한테 빌붙어 너를 먹여살렸어. 그러니 이제 네가 나를 먹여살려야 돼. 그 훈장속에서 나는 엄마의 소리를 듣는다.
비행기 소리는 아까보다 더 크게 들린다. 공항에서 가까운 동네라 늘 비행기 떠나는 소리에 더욱 잠을 이룰 수가 없다. 그래도 지금 자두어야 한다. 피로가 밀려온다.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쓴다. 수면용 안대라도 사야겠다. 일어나 창문을 연다. 변압기에 연결된 전선주 끝에 파란 색종이만한 하늘이 걸려 있다. 하늘 저 편으로 비행기 꼬리가 사라진다. 골목에는 아이들이 뛰놀고 있다. 여자 아이 둘이 고무줄 놀이를 하고 있다. 샌들을 신은 아이의 희고 가는 다리가 한 움큼 뛸 때마다 치마가 들썩거린다. 어렸을때 엄마 방에 낯선 남자가 들어오면 나와 수인은 거리로내몰렸다. 손에는 미제 초콜릿과 캐러멜이 쥐어졌다.
수인과 내가 고무줄놀이를 하고 놀때면 남자 아이들은 고무줄을 냅다 끊어놓는 장난을 했다. 남자 아이들은 수인을 에워싼다. 니, 엄마는 똥갈보야. 넌 거기 털도 노랗니? 수인은 울음은 터트린다. 난 남자 아이들이 수인이를 더 괴롭히기를 바란다.텔레비전 소리에 잠이 깬다. 텔레비전의 화면과 음향은 선명하지 않다. 난시청 지역이다. 엄마는 계속 채널을 돌려댄다. 난 이불을 들추고 벽시계를 바라본다. 시계바늘은 6시30분을 가리키고 있다. 잠이 깨어서도 습관적으로 오래오래 이불속에서 누워 있다. 이불 속에서의 잠깐의 평화, 유일한 휴식. 이제 출근 시간이 얼마남지 않았다. 엄마는 계속 채널을 돌렸다. 엄마, 지금은 아이들 만화 시간이야.
엄마가 밥상을 내왔다. 밥상 너머로 한쪽 다리를 접은 엄마의 다리에 검은 반점이선명하게 들어온다. 엄마는 밥을 먹다말고 눈물을 닦아낸다. 엄마는 치마 끄트머리를 한 손으로 올려 눈물을 훔쳐낸다.
"눈물이 나는 병이면 안과에서 치료를 해야지, 왜 이비인후과에서 수술을 해야 하느냐 말이야?"
"눈물이 나오는 관이 막혔다나. 눈물관이 막히면 눈물이 코로 넘어가지 못하고 눈으로 넘쳐나는 병이래. 하수구가 막히면 하수가 빠져나가지 못하고 넘쳐나는 것과마찬가지란다"
엄마의 눈에는 물기가 촉촉하다. 마르지 않는 눈물샘 때문에 엄마의 얼굴은 늘 눈물로 파운데이션이 번져 있다. 수술비가 얼마 드는지 물어보지 않는 나의 침묵을못마땅해하는 표정이다. 엄마는 수인의 엽서를 읽었을까. 그 아이가 찾아오면 반가워하실까. 밥을 먹다말고 담배에 엄마는 불을 붙인다. 텔레비전 화면에는 여름이 오지도 않았는데 전국의 관광지와 해수욕장의 숙박시설이 벌써 예약이 끝났다고 한다. 엄마는 밥 뚜껑에 재를 털어낸다. 담배 연기가 입술 사이에서 풀풀 풀어져 나온다.
그때 초인종이 울린다. 문을 열자 나는 한 눈에 그녀임을 알아 차린다. 선명한 이목구비와 커다란 쌍꺼풀, 튀기라고 놀림받던 저 붉은 빛이 맴도는 머리카락, 삼년전에아무소리도 없이 나간 수인이다. 한 손에 사각형의 케이크 상자가 들려 있다. 오랜만이야. 수인이 방안을 둘러본다.
방안에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엄마는 갑자기 나타난 딸앞에서 무슨 말을 어떻게풀어야 할지 난감해하는 표정이다.
"나, 다음주에 떠나. 내가 이땅에 없다는 것을 알리기는 해야 할 것 같아서. 미국사람과 결혼했어. 이제 미국시민이 됐지"
수인이 핸드백에서 한장의 사진을 내놓는다. 사진 속에는 흑인이 흰 이를 드러내놓고 수인이 옆에서 웃고 있다. 사진을 내놓는 수인의 손목위에는 직선으로 난 칼자국이 보인다. 사춘기 때부터 시작된 수인의 자살 시도. 부엌의 타일 바닥에 떨어지던 수인의 붉은 피. 진통제 30알을 먹고 육교 위에 쓰러져 있던 수인.
"수인아, 어떻게 흑인이랑 결혼을?"
엄마는 말 중간중간에 눈물을 찔금거린다.
"난 수인이가 아니야, 수지라고 이름을 바꿨어. 이 사람은 마이클이구. 미국에 간다구 날 버린 아버지를 찾으라는 얘기는 하지 말아요"
수지와 마이클. 나는 시선을 내리깔고 사진 속의 흑인을 곁눈질한다. 그래 넌 이제너와 비슷한 혼혈아를 낳겠구나. 검은 피부와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을 가진 아이 말이야. 가벼운 진동 소리가 나면서 비행기 지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텔레비전 화면이잠시 떨린다. 나는 수지의 얼굴을 보는 대신 텔레비전의 화면을 바라보았다.
가게 안은 빈 교실처럼 한적했다.
"어저께 그 아이 어떻게 됐대"
"어떻게 되긴 뻔하지. 알고보니 그 애 아버지가 알코올 중독자라나. 그 아비가 매일술 사오라고 그 애에게 시켰대나봐"
조금만 교대 시간이 늦어도 김군에게 미안한 생각이 든다. 김군이 편의점 밖으로사라진다. 나도 이제 졸업하려면 2학기가 남았다. 그동안 휴학을 2번이나 했다. 복학할 때마다 생뚱한 얼굴로 대하는 학과 아이들도 낯설기만 했다. 김군처럼 야간학부를 선택했다면 지금쯤 졸업을 했을텐데. 무슨 일이든 정석으로 하려는 고지식한 성격 탓이다. 가게 한 켠에 있는 수납창고에 들어가 유니폼을 입는다. 유니폼이래봐야 초록색과 흰색이 줄무늬로 프린트 된 것인데 앞치마를 두른 것 같이 촌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시선을 돌려 거리를 내다본다. 거리에는 벌써 네온 사인이 어둠 속에서 빛나고, 정면으로 보이는 C호텔의 회전문이 돌아갈때마다 호텔 로비의 화려한 샹들리에 불빛이 반짝거린다. 차량들이 라이트를 밝히며 속력을 낸다. 여자 하나와 남자 하나가호텔의 회전문에서 나와 신호 대기선 앞에 서 있다. 횡단보도를 건너는 여자의 걸음이 약간 휘청거린다. 이 시간쯤이면 호텔 나이트클럽에서 나온 사람들이 주차된차를 몰고 나가거나 택시를 타는 시간이다. 문이 열리며 횡단 보도를 건너던 여자와 백인남자가 들어온다. 오늘도 다른 남자다. 눈썹이 유난히 짙은 남자는 주류 품목에 가서 맥주를 고른다. 카운터 앞에 선 여자는 아가씨 그거 없어요? 혀가 꼬부라진 소리다. 그거 있잖아. 디스 이즈 콘돔. 여자의 입에는 단내가 난다. 맥주를 골라 카운터로 걸어오는 백인 남자에게 여자가 검은색 메니큐어가 손끝에서 반쯤 떨어져나간 손가락으로 작은 원을 그리며 유 아 라지 사이즈, 스몰 사이즈라고 말한다.
"웨어 이즈 콘돔?"
"약국에 가봐요"
캔에 스캐너를 신경질적으로 찍어댄다.
"아니, 그런 필수품도 없어? 그러면서 무슨 편의점이야"
그래, 어릴때부터 엄마 방 휴지통에서 화장지에 뭉쳐진 것들의 그 이상한 냄새. 그방안 가득하던 비위 상하는 냄새. 나는 여자를 한동안 바라본다. 여자는 휘청거리는걸음으로 남자에게 기댄다. 남자가 계산을 끝내고 어깨를 으쓱 들어올리곤 여자를부축하고 나간다.
그를 만나러 가는 길에는 S병원의 영안실 뒷문을 지나야 한다. 왜 그를 만나라 가는 길에 하필 영안실이 있는지 이 길이 항상 생경스럽다. 흰 국화로 만들어진 세대의 대형 화분을 지난다. 화분 옆으로 하얀 소복을 입은 여자가 걸어나오고 있다.사내 아이가 여자의 치마 한 끝을 잡고 걸어간다.
이 길을 지날 때마다 어린 날 하얀 상복을 입고 아버지를 묻으러 가던 겨울의 찬바람이 생각난다. 아버지의 상여에서 바람이 불 때마다 사각거리던 햐안 종이꽃. 종이꽃… 바람에 날리던 종이 꽃잎들. 열 네개의 목조계단을 밟는다. 문을 열며 그를찾는다. 창가 끝에 그가 앉아 있다. 갈색 다탁 위에는 원두가 한 알 띄워져 있는 찻잔이 놓여 있다. 그는 나를 기다려 차를 마셔본 적이 없다.
갑자기 불러낸 것 아니니? 고시원에서 두 달을 쳐박혀 있던 그의 첫인사다. 그는손으로 앞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치켜올리며 자기 삶의 고단함을 이야기 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소리가 언제부터인가 건성으로 들린다. 나는 그에게 무슨말을 하고 싶은 걸까. 제발 확실한 것 아니면 그만두라는 말을 나는 하고 싶은 걸까. 지난 겨울부터 보아온 밤색으로 물들인 군용잠바를 이제는 벗었으면 하는 생각을 문득 한다. 찻집을 나와 길을 나선다. 그와 같이 영안실 앞을 지나간다. 여자의곡성 이 들린다.
대낮에 여관을 드나드는 일은 이제 그와 나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 세상 사람들과 격리된 작은 방으로 가는 단순한 행위일 뿐이다. 그가 먼저 앞장을 선다. 나는 1백m쯤 떨어져 그를 미행하는 사람처럼 그의 뒤를 따라간다. 나 자신이 너무천연덕스럽다는 것도 전혀 느끼지 못한다. 그의 낡은 가방이 그의 걸음과 같이 흔들린다. 머리 꼭지 위에서 정오의 햇빛이 따갑게 내려앉는다. 평화여관 입구다. '평화'라는 단어가 이 왜소한 여인숙과 정말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에 잠시 우울해진다. 평화, 무슨 평화. 문 앞에 섰을 때 그가 나의 얼굴을 한번 쳐다본다. 202호,방의 걸새를 잠그는 그의 손놀림이 굼뜨다. 전에도 이 방에 몇번인가 들어온 적이있다. 그는 군용점퍼를 벗어 옷걸이에 걸어두고 욕탕으로 들어간다. 수도물 트는 쇳소리.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가만히 방 안을 살펴본다. 회색 비닐에 싸인선풍기 날개, 오분의 일 가량이 남은 로숀 병, 그 옆에 연두색 큰 빗자루 빗, 플라스틱 쟁반 위에 포개진 2장의 수건, 나는 침대 모서리 한 켠에 앉아 자잘한 꽃무늬가 가득한 이불에 실밥이 드러난 호청을 만지작거린다. 시트에 손주름이 생긴다.그는 발의 물기를 털어내고 가방에서 술을 꺼낸다. 술이 없으면 불안해. 술병은 침묵으로 가라앉은 방 안에서 조용한 정물로 가라앉는다. 섹스가 시작될 때면 나는엄마의 검은 반점이 생각난다. 엄마의 허벅지에 북두칠성으로 박힌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흔적. 수인과 나를 비가 오는 거리로 내몰고 엄마는 무엇을 하였을까. 그의등에서 흐르는 빗방울의 입자들을 더듬는다. 나는 그에게 몰두하지 못한다. 그의 등너머 누렇게 바랜 전구의 깜박이는 불빛을 본다. 그 희미한 불빛 속에서 우리에게희망이 없는 날이 계속 지속되리라는 것을 새삼 발견하게 된다. 커튼을 열고 창문을 연다. 10센치 폭의 창문턱에 노란 먼지가 쌓여있다. 밖에는 하얀 색의 영구차가를 이어 영정을 가슴에 안은 남자 아이가 영구차에 오르고 있다. 하얀 소복을 입은여자가 뒤따르고 있다. 하얀 치마가 바람에 흩날린다. 그는 잠을 자기 시작한다. 그에게 섹스는 수면제다. 옆 방에서 여자의 나지막한 소리가 들려온다. 벽은 아무런차단벽이 되어주지 못한다. 텔레비전 앞에 몸을 옹송거리고 앉는다. 침대와 텔레비전 사이는 다리를 裡 못할 정도의 좁은 간격이다. 벽 사이를 두고 들려오는 여자의 소리는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진다. 그의 코고는 소리가 여자의 소리와 뒤섞인다. 나는 긴 한숨을 쉬다가 담배를 피운다. 생수병 옆에 있던 그의 담배갑을 거꾸로세워 방바닥에 쏟는다. 방바닥에 담배를 일렬로 줄을 세운다. 담배 열개는 60센티길이로 이어진다. 나는 담배를 한 대씩 피워댄다. 그가 몸을 뒤채며 부스럭거리는소리를 낸다. 등을 돌려 그를 바라본다. 그의 아랫도리는 이불까지 팽개쳐져 있다.텔레비전의 채널을 돌린다. 소형 텔레비전의 화면에는 주말 드라마의 여자 주인공의 얼굴이 클로즈업되고 있다. 담배재를 브라운관에 비벼 대고 끈다. 담뱃재가 떨어진다. 방바닥에는 그의 면바지가 구겨진채로 아무렇게 널브러져 있다. 그 옆에 내스타킹이 동그랗게 말려 있다. 담배 한 대를 다시 문다.
나는 시선을 창 밖에 두고, 건너편에 있는 호텔의 회전문을 응시한다. 둥근 반원을그으며 문이 회전할 때마다 사람들이 하나 둘씩 들어가고 나오는 것을 바라본다.호텔의 주차장에는 차들이 빼곡이 들어차 있다. 불빛이 환한 거리는 곧 비가 쏟아질 것처럼 어두컴컴하다. 시계 바늘이 자정을 가리키고 있다. 길 건너 한 사내가 비디오점의 셔터를 내린다. 문득 이 시간 정도면 나도 가게의 문을 닫고 집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부질없는 생각이다. 아직 새벽이 오지도 않았는데 마음속에는 벌써 밤을 다 지새버린 것 같다. 문이 열리며 손님이 들어온다. 그 여자다.여자 옆에는 키가 큰 흑인이 있다. 여자는 취했는지 가끔 한쪽으로 쏠리는 몸을 지탱하려 깨끔발을 한다. 드러난 빗장뼈 밑으로 가슴의 윤곽이 드러나 보인다. 여자와흑인은 주류 품목으로 걸어간다. 고개를 치켜들고 감시 화면을 바라본다. 화면 속의여자의 모습은 흑인의 팔짱을 꼭 낀채 술병을 매만지고 있다. 계산대에 위스키 1병과 담배를 올려놓는다. 여자의 회색 립스틱이 아래 입술 밖으로 번져있다. 나는 아무런 표정없이 계산을 해준다. 여자는 문 앞으로 나가다가 다시 카운터 앞으로 돌아온다.
"혹시 그거 있어?"
저 여자는 오늘도 내게 말장난을 시작한다.
"콘돔 말고… 코카인? 호호호 순진하긴, 농담이야, 농담. 이 우산 얼마야?"
여자는 코카인이라는 단어를 소근거리듯 말하며 입 끝을 실룩거린다. 유리창에 빗방울이 흩뿌려지기 시작한다. 여자가 문을 열고 나가 파란 색 우산을 편다. 한 손에는 우산을 들고 한 손은 흑인은 팔짱에 매달려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다. 비오던 어린 날, 엄마가 낯선 남자를 데리고 왔다. 남자는 군복 차림이었다. 엄마는 비닐 우산을 내어주며 수인과 나를 거리로 내몰았다. 그런 일은 종종 있는 일이었지만 소낙비가 오는 거리로 내몰리는 것은 처음이었다. 수인과 나는 비를 피하러 다른 집처마 밑에서 엄마의 용건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수지는 내게말했었다. 내가 아주 깊은 잠이 들었을 때 베개로 내 얼굴을 덮어줘. 깨어나지 못하게 나를 도와줘. 나는 한 번도 수지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지만 수인이 응급실에실려갈 때마다 허둥대는 엄마를 보는 것에서 어떤 위안을 느꼈다. 가끔 길 모퉁이구석에서 아이들에게 둘러싸인 수인의 모습을 엿보았을 때 놀림을 받는 수인의 모습을 보는 것이 왜 나에게 위안이 되었을까.
노인이 들어온다. 노인은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 옷 소매로 닦는다. 초록색 바탕에검정색 줄이 쳐진 우산을 사 가지고 간다. 유리문 밖에는 차들이 비상라이트를 켜고 달리고 있다. 우산을 편든 노인은 이차선 도로를 빠른 걸음으로 뛰어가고 있다.오늘밤에는 우산이 많이 팔릴 것이다. 노인이 나가면서 거리의 차가운 습기가 실내로 들어온다. 나는 감겨오는 눈꺼풀을 깜박거린다. 종이컵에 커피를 한잔 따라 마신다. 핸드백을 뒤져 엷은 백색의 알약을 꺼낸다. 커피 한잔으로는 잠을 쫓기 힘들다.이 두알의 약으로 오늘밤의 수면을 견디어 내어야 한다. 물을 마시고 약을 삼키는순간 거리에서 요란한 엔진소리가 난다.
세 대의 혼다 오토바이가 아스팔트를 긁는 쇳소리를 내며 밤의 정적을 깨운다. 머리를 귓머리까지 치켜 올린 사내아이들이 두명씩 타고 있다. 중앙선 한가운데서 오토바이는 잠시 멈추었다가 시동을 끈다. 다시 속력을 낸다. 바퀴에서 검은 연기가솟아나온다. 맨살에 가죽조끼를 입은 사내들이 헬멧을 벗은 채 문을 열고 들어온다.헬멧에 굵은 빗줄기가 뚝뚝 떨어진다. 맥주 캔을 계산한다. 간이 식탁에 가서 맥주를 마셔댄다. 오징어를 입에 거세게 밀어넣는다. 나는 감시화면을 바라본다. 화면속의 사내 하나가 나를 흘깃 쳐다본다. 나의 시선은 화면속의 남자와 만난다. 순간 몸이 오싹해진다. 사내들은 맥주캔을 쓰레기통에 집어 던지더니 그 중에 한 사내가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순간 실내는 노래소리로 시끄러워진다. 사내들이 밖으로나간다. 그들이 오토바이에 시동을 걸 때 바퀴에서 검은 연기가 솟아나온다. 빠르게회전하는 오토바이의 바퀴살에 빗방울이 톡톡 튀긴다. 빗속에서 부르는 사내들의노래소리는 엔진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사라진다. 조금 긴장한 탓인지 힘이 빠진다.오토바이가 남기고 간 소리의 진동이 희미하게 귓속에 남아있다. 나도 어디로든 달려가고 싶다. 수인이 이 땅을 버리는 것처럼 나도 어디로든 가고 싶다.
단발머리 아이가 문을 열고 들어온다. 이 시간에 웬 일일까? 머리카락이 비에 젖어귀밑에 말려있다. 아이는 표정없는 얼굴로 술이 진열되어 있는 곳으로 간다.
"계산해주세요"
지갑에서 지폐를 꺼내는 단발머리 아이의 손끝이 가늘게 떨린다. 나는 아이의 표정을 살핀다. 초점이 흐릿한 눈동자가 붉게 충혈이 되어 있다. 지갑에서 돈을 꺼내려던 손이 순간 멈춘다. 돈이 안돼요. 바람이 훅 안으로 들어온다. 아이는 빗속으로나간다. 나는 순간 술과 우산을 집어들고 아이의 뒤를 따라간다. 그러나 뛰어가는아이의 걸음을 따라갈 수가 없다. 나는 빗속을 달려간다. 아이는 횡단보도의 신호등을 무시한채 무단횡단한다. 아이는 벌써 길 건너 맞은편 버스정류장 있는 곳을 걸어간다. 나는 비닐 포장을 풀르지도 않은 우산과 술병을 든채 붉은 신호등 앞에 가만히 서 있다. 아이는 내일 다시올까. 자리에 돌아와 빗물을 털어낸다. 카운터 의자에 힘없이 앉은 순간 천장에 걸려 있는 모니터와 시선이 마주친다. 회색의 감시화면에 실내의 많은 물건들이 갑자기 질서를 잃어버리고 허공에 매달려 있는 것 같다. 허공에 매달린 나의 얼굴이 보인다. 실내에는 서로를 보고 있는 나와 모니터 뿐이다. 가로 30㎝ 세로 25㎝의 회색모니터가 나를 보고 있다. 사각형의 모니터에 잡힌 내 얼굴은 아주 우스꽝스럽게 보인다. 비에 젖은 머리카락이 얼굴에 찰싹 붙어서 물에 빠진 생쥐 모양이다. 나는 왼쪽 벽면 모서리에 있는 플러그를 한 손으로뽑아버린다.
유리문이 열리며 우비를 입은 신문 배달하는 아이가 들어온다. 손님 많았어요? 아이의 의례적인 인사는 이제 나의 긴 밤노동이 끝났음을 알려준다.
카운터 위에 던지고 간 일간 신문을 넘긴다. 신문의 석유냄새때문에 속이 쓰려온다.시계는 7시를 가리키고 있다. 이제 그 여자가 올 시간이다. 그 여자의 노동도 이제끝났을 것이다. 신문을 가판대에 비치한다.
전화벨이 울린다. 그의 목소리다.
"이번이 마지막이야"
전화는 조용히 끊긴다. 마지막이야 하는 소리는 그가 고시원에 들어갈때마다 하는말이다. 그말은 지난 육년동안이나 그에게서, 마치 선언문처럼 들은 소리다. 그가고시 공부를 일년 더 연장한다면 난 자연스레 몸안에 삽입한 피임기구의 제거를 일년 보류해야 한다. 앞으로 몇년을 더 고시원에서 보내야 하는지, 고시 준비생이 직업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이제 그만 포기해야 할줄도 알아야한다고 그에게 말했어야 했다. 권투선수가 시합에 출전하기 전에 단지 워밍업하는 정도의 느낌으로 만나고 싶지는 않다고 나의 생각을 말했어야 했다.
수납창고로 가서 유니폼을 벗는다. 발끝에 채이는 물품 박스에서 먼지가 포시시 일어난다. 작은 밀창으로 아침 햇살이 비쳐온다. 밀창으로 보이는 하늘은 푸르다. 수박스에서 라면을 꺼내 진열칸에 넣는다. 수고해. 이제 집으로 가서 잠을 자야한다.핸드백을 메고 횡단보도를 건너 버스 정류장을 향해 걸어간다. 호텔 주차장에 드문드문 빈공간이 있다. 어디선가 사이렌 소리가 울리며 그 빈 주차선안에 하얀 응급차가 들어선다. 응급차문이 열리며 흰 가운을 입은 남자 둘이 들것을 들고 호텔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인다. 잠시후 벨 보이와 함께 회전문이 열리며 들것에 사람이 실려나오고 있다. 여자의 얼굴이 사람들 사이에서 얼핏 비친다. 나는 순간적으로구경꾼들 사이에 고개를 들이민다. 그 여자다. 여자의 가무잡잡했던 피부는 밀랍 인형처럼 창백하다. 빗방울이 여자의 얼굴에 떨어진다. 그녀는 죽은 것일까. 하얀 시트 밖으로 여자의 팔목이 축 늘어져 있다. 팔목에는 많은 주사 바늘 자국이 새겨져있고, 푸른 멍자국이 난 혈관이 불룩 비져나와 있다. 들것을 따라가던 벨 보이가 나지막한 소리로 말한 裏 흑인한테 당했어. 그 곳에 우산을 꽂기까지 했어.
응급차가 주차장을 빠져나가 차도로 들어서는 것을 나는 가만히 선 채로 바라본다.여자를 실은 응급차가 시야에서 사라진 순간, 나는 문득 호텔 건너편에 있는 편의점에 시선을 돌린다. 유리창 너머 김군이 내가 서 있는 곳을 빼꼼이 쳐다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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