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98 새해특집-발굴...여성운동 대구.경북 1백년

(1)국채보상운동

'요람을 흔드는 손이 세계를 흔든다' 나라가 기울어 갈때 우리 겨레의 여성은 더 힘든 일을 해냈다. 이 나라 이땅의 여성들은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건 그 숱한 지사들을 키우고 집을 지켰으며,나라의 주권을 빼앗기고 나라의 이름마저 없어질 때, 봉건사회의 유습을 박차고 흰 저고리.검은치마로 새 문화를 배워 민족의 힘을 기르는 일에 앞장섰다. 국채보상운동과 애국계몽운동, 교육운동에 대구경북여성들이 발벗고 나선지 어언 90여년. 꺼질듯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희망을 잃지않고나라살리기와 남녀평등을 일궈온 대구.경북여성 1백년사를 발굴.정리한다. 〈편집자 주〉1907년 2월23일. 이보다 며칠전 대구의 남성들이 성밖 북후정에 모여 국채를 갚기위해 단연운동을펴고 있을때 대구 동상면 남일동(현재 대구시 중구 남일동 한일호텔 뒷편) 정운갑의 집에서는 이마을에 사는 부인 7명이 모여서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할 것을 결의했다. 이른바 부인들이 사치의상징인 패물을 착용하지 말고, 각자 손가락에서 패물을 뽑아서 나라빚을 갚는데 쓰자는 '대구 남일동 패물폐지부인회'(佩物廢止婦人會)가 결성됐다.

정미년 설을 쇠고난지 열하루째, 즉 음력 1월11일이었다. 정운갑의 집에 모인 7명의 부인들은 "남정네가 담배를 끊고 그 돈으로 국채를 보상한다는데 내조의 의무가 있는 여자들도 국민된 의무로당연히 참여해야한다"고 결정하고 순 한글로 된 취지문을 공포했다.

'우리가 함께 여자의 몸으로 삼종지의외에 간섭할 일이 없으나 나라 위하는 마음과 백성된 도리야 어찌 남녀가 다르리오. 국채를 갚으려고 2천만 동포들이 석달간 연초를 아니먹고, 갚은 돈을구한다하니 어찌 아니 감동되며, 어찌 아니 아름다우랴. 그러나 부인들은 논외로 한다니 여자들은백성이 아닌가. 태산이 흙덩이를 사양치 아니하고, 바닷물이 시냇물을 가리지 아니하기로, 부인들은 우리가 가진 패물 등속으로 국채를 깨끗이 갚음이 어떠하리오'

정운갑의 모 서씨 은지환 일불 두냥쭝, 서병규 처 정씨 은장도 두개 두냥쭝, 정운하 처 김씨 은지환 일불 한냥 구돈쭝, 서학균 처 정씨 은지환 일불 두냥쭝, 서석균 처 최씨 은지환 일불 한냥 오돈쭝을 기부했다.

이처럼 대구.경북여성의 국채보상운동 참여는 개인적인 참여가 아닌 조직을 통한 적극적인 참여였고, 이제까지 가정안에 머물던 여성들의 관심이 나라의 운명을 구하는 사회적인데로 돌려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대구여성들이 패물폐지부인회를 조직하여 전국 부인동포들을 고무한 후, 이에 뜻을 같이하는 여성국채보상단체가 전국 각지에서 조직되었다. 당시 발행되던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황성신문'(皇城新聞) '제국신문' '만세보'(萬歲報) 등 신문을 중심으로 조사한 결과 약 30개의 국채보상여성단체가 조직돼 활동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중 대구의 '국채보상탈환회'(國債報償脫環會), 서울의 대안동국채보상부인회, 진주의 애국부인회,인천의 국미정성회, 김포의 국채보상의무소 등 10개 단체의 활동영역이 컸다.

국채를 갚기위해 손가락에서 반지를 뽑자는 뜻이 담긴 대구의 '국채보상탈환회'는 같은 해(1907년) 4월 장의근의 장모 공씨, 김덕유 조모 엄씨에 의해 발기되었다. 이 회는 1천만 여자중 손가락반지있는 이가 반은 넘을 터이니 지환 하나에 2원씩만 치더라도 1천만원이 여자수중에 있는 것이므로 여자의 손가락을 속박하는 이 지환을 뽑아 국채를 갚자고 호소했다. 국채의 상환여부가 곧민족적 생존의 심각한 과제임을 다음과 같이 갈파했다.

'상략(上略). 슬프다 우리 동포 자매여. 기백년 압제 아래 자유의 즐거움을 다 잃고, 의복음식의소중함과 아들 딸사랑을 살아있는 낙으로 삼았더니 국가가 위태한데 귀한 것이 무엇이며 사랑한것이 무슨 쓸데 있소. 나라 위태하니 집안의 부모는 장차 어느곳에 장사하며, 강보의 어린아이는장차 뉘의 종이 되리오. 말과 생각이 이 지경에 이르메 심장이 상하며 눈물을 감추지못하고, 남의노예를 면치 못할 아들 낳아 무엇하며 딸길러 무엇할꼬. 중략. 이렇듯이 국채를 갚고보면 국권만회복할 뿐 아니라 우리 여자의 힘을 세상에 전파하여 남녀동권을 찾을 터이니...'국가와 민족 파멸의 위기의식이 국가사에 한번도 관여한 일이 없던 부녀들에게 국권회복을 여성의 힘으로 이룩해야한다는 새로운 의무감을 갖게 하고, 새로운 역사의식을 갖게 한 것이다.강토를 가볍게 여겨 토지를 저당잡히고 국채를 차관한 남자들보다 여성이 더 역량있는 민족사의주인공이 되려는 자부감은 여성 스스로 국권을 회복시킬 수 있으며 남녀동권도 구할 수 있다는적극적인 의식으로 확대발전됨을 보여준다.

패물과 금전 다소를 가리지않고, 수합하며 의연된 금품을 기성회로 보내고 신문에 게재한 여성들은 이외에도 '대구남산국채보상부인회', '경주 흔바위예수믿는 부인회'등〈도표참조〉이 있다.이처럼 여성들의 사회적 의식성장에 중요한 계기를 부여한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한 여성단체중에는 10개 단체가 조직된 경상도가 34%%나 차지하고 있으며 다음은 5개 단체가 있는 경기도로17%%를 점유했다.

이러한 국채보상운동의 여성의연자 1천8백21명 가운데 양반 및 유지부인층이 전체의 63.6%%, 부실(副室.첩)이 6.6%%, 기생 21.8%%, 여학생 5.1%%로 나타났다.

계명대 사학과 김도형교수는 "1907년 6월에 결성된 이면주 부인 서주원, 구연목부인 등 2명으로구성된 남산국채보상부인회의 서주원의 경우 온동네를 다니면서 신발이 헐 정도로 모금운동에 열의를 다했다"며 이는 국가적 위기를 맞아 여성들이 사회적으로 할 수 있는 역할이 주어졌다는 판단 아래 이전의 봉건적인 여성상에서부터 스스로 변모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1907년에 전국을 휩쓸었던 국채보상운동에 각계 각층의 여성들이 적극적 자세로 자진 참여하고또 이 운동을 위한 여성단체들이 전국 곳곳에서 조직되었다. 이 운동의 여성참여는 여성의 항일구국의식을 제고시켰고, 구국에 있어서의 남녀동등 실현을 주장하게 되었다"고 박용옥교수(성신여대)는 강조한다.

박씨는 "국권수호라는 국가의 중대사에 여성자신이 자발적으로 참여함으로써 남자만이 독점하였던 정치사에 여성도 참여하게 되었고, 남성지지자에 의해 주도되던 개화기 여성운동에서 탈피하여여성이 독립적으로 거국적 운동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며 남자편에서 주는 식의 남녀동권 관념이 완전히 깨지게 됐다고 밝힌다. 〈崔美和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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