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소백산맥(3)-석탄캐는 사람들

봉화를 지나 넛재(896m)를 넘으면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산세와 물빛이 다르다. 집들도 을씨년스럽고 산도 곳곳에 탄굴(炭窟)을 내놓은 것이경상도와는 판이하다. 한반도의 등마루 도시 태백이다.

예전에는 탄가루에 물든 검은강, 검은 산이었지만 지금은 그 검댕이 빠지는 단계다.그래서 검지도 희지도 않은 회색빛 도시가 되고 있다.

소위 '막장인생'. 지표에서 1천m나 내려간 지하, 탄더미가 쏟아져 내릴것 같은 불안속에서도 탄을 캐는 사람들. 직업에 귀천이 없다지만 그들의 '인생'은 '막장'에서힘들게 머물고 있다.

대한석탄공사 장성광업소(소장 신현국). 오후 3시30분 갑방(甲方)과 을방의 입출갱이 이뤄지는 시간. 6천여명의 근로자가 있던 80년대 초만 하더라도 입출갱은 한마디로 '장관'을 이뤘다. 그러나 지금은 3개조중 2개조 6백여명이 간격을 두고 띄엄띄엄 이뤄질 뿐이다.

평상복을 갈아 입은 그들에게서 낯선 느낌이 든다. 늘 검은 탄가루가 묻은 모습만봐서인가. 마치 사우나라도 다녀온 듯 말쑥하다. 얼굴도 발갛게 익었다.

석공(석탄공사) 앞 구(舊) 길을 가다보면 오른쪽 나지막한 선술집이 있다. '미향집'.곧 스러질듯 퇴색된 70년대식 선술집으로 탄광사람들이 목에 낀 탄가루를 술로 훑어내는 곳이다.

오후 4시30분. 드럼통 술탁자에 갑방 직접부 10여명이 둘러 앉아 목을 축이고 있다."막장이 얼마나 더운지 알아요. 체감온도만 40도가 넘어요". 지하 30m당 섭씨 1도가 올라가니 한겨울에도 30도를 웃돈다. '에어'가 들어오지만 밀폐된 공간 습도가95%%나 돼 "연장 하나만 집어도 한 종지 땀은 쏟아낸다"고 했다. 그래서 한번 들어갔다가 나오면 "온몸의 물을 다 빼니 사우나 아니고 뭐겠냐"란다.

그들의 얘기는 주로 탄(炭)이다. "요즘 시골 노인들 다 얼어 죽어. 기름값 오르니보일러를 켤수가 없지. 효도한답시고 기름 보일러 놓아 드렸는데 오히려 불효가 된게야". "기름을 쓰던 비닐 하우스는 요즘 죽을 지경인 모양이야. 전에보다 난방비가배나 더 든다던데". '석탄의 대반란'이라도 기대하는 눈치다.

한때 석탄은 '황금'이었다. 우리의 등을 따습게 해주는 최대의 에너지원이었다. 석탄이 사양길로 접어든 것은 1988년. 정부는 유류와 가스를 주력 에너지원으로 정하고 석탄산업의 구조조정에 들어간 해다. 이후 석탄산업은 급락해 당시 태백에 45개이던 탄광은 지금 3개만 남았고 근로자들도 1만6천명에서 3천명선으로 급감했다.옛날 얘기가 나온다. "옛날엔 좋았지. 돈이 참 맛있었어". 돈이 귀했던 70년대 탄광은 딱이 기술이 없더라도 돈을 실팍하게 만져볼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10대 1의치열한 경쟁을 뚫고서야 석공에 취업할수 있었다. 81년 초임 33만~35만원. 이정도는대기업 부장 월급이다.

서울의 반반한 여인들도 '금광'을 찾아 태백으로 몰려들었다. "장성에만도 색시집이스무 댓군데 됐다"며 12년째 미향집을 경영하고 있는 김우필 할머니(64)가 옆에서거든다. 그때 태백시는 유동인구 20만명에 인구 대비 다방과 술집이 가장 많은 도시였다. 그러나 지금 김할머니가 얘기하던 '색시집'은 한군데도 없고 태백시의 인구도 6만으로 떨어졌다.

"작업 환경이야 최악입니다. 말이 하루 8시간이지 힘든 걸로 따져 이만한 것이 있겠습니까". 3교대. 갑방(오전8시~오후4시) 을방(오후4시~밤12시) 갑방(밤12시~아침8시)가 일주일씩 교대한다. 생체리듬도 깨지고 을방이면 자식 얼굴 한번 보기 어렵다. 2년전부턴 신규채용도 하지 않고 있다.

문제는 미래다. 탄만 캐다보니 다른 기술도 없고 다른 사업에 눈돌릴 겨를도 없다."시골구석에 처박혀 있으니 도시에 나가는 것도 두렵다"고 한다. 종착역 없는 무한궤도. 그래서 일반기업보다 근속연수가 높다. 석공의 경우 평균 16~17년. 정년(55세)이 종착역이라면 종착역이다.

그래도 최근 석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것이 일말 반갑기도 하다. 태백시(시장홍순일)는 태백발전민간기획단과 전국 진폐재해자협회, 광산지역사회연구소와 함께'석탄소비 촉진 운동'을 펼치고 있다. 옛 영화(榮華)를 다시 찾을수는 없지만 석유일변도의 에너지정책에 변화를 줄수 있기를 바란다. 석공의 안상정개발과장은 "현재는 재고물량 2백만t에서 빠져나가지만 차츰 출하량이 늘어나고 있다"면서 "농촌시설의 석탄연료화는 충분히 타당성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고 했다.

그렇지만 얼큰히 취한 술좌석은 원성이 높다. "지금 다시 석탄소비하잔다고 금방되는 게 아니잖아" "에너지도 무기(武器)인데 우린 뭐야. 석유가 좋다고 석탄을 이렇게 내버려둬도 되는 거야""석유가 비싸지면 그때가서 어떻게 석탄으로 대체한단말이야"

석탄 캐는 사람들. 몸부림쳐 얻어낸 우리나라 산업화의 최대 기여자이다. 여전히 그들에게선 검은 탄같은 원시(原始)의 힘이 느껴진다. 뜨거운 용광로를 지펴 모든 것을 녹여내는, 바로 거대한 소백산백에서 투영된 잠재력이다.

돌아오는 넛재에는 소백의 밤이 큰숨을 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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