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윤기의 세상읽기-우리문화 어디쯤 가고 있을까

신소리 몇 마디로 글을 연다.

신소리란 무엇인가? 상대의 말을 엉뚱하게, 어긋나게 받아넘기는 말이 곧 신소리다. 한 마디로 말장난이다. 가령 다음과 같은 대화를 보라.

"신소리가 뭡니까?"

"신이 소리를 하면 발바닥은 육자배기를 한다는 소리지"

"가르쳐 주어서 고맙군요"

"곰 왔다고? 곰 왔으면 총 놔야지. 총 있어?"

"글세요"

"글세는 훈장이 글 가르치고 받는 것, 그것이 글세여"

"…"

"어째 대꾸가 없어?"

"미안합니다"

"미안은 쌀 눈이 미안(米眼)이여"

우리말의 선수들인 우리에게, 말 놀이 수작이 자못 영롱한 이런 투의 글은 재미가 있다. 이 재미는 우리말의 감칠맛 나는 쓰임새에서 연유한다. 하지만 이런 글을 외국어로 옮길수 있는가? 없다.왜 없는가? 어디까지나 한국어 말장난일 뿐 보편성, 일반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글은한국어가 유창하게 쓰이는 특정한 문화 환경에만 유효할 뿐, 그 환경을 벗어나면, 다시 말해서 번역하면 번역의 과정에서 그 말맛이 날아가 버리기 때문이다.

'가역성(可譯性)'이라는 말을 한번 써보자. 가역성이 무엇인가? '번역될 수 있음(Translatability)'이다. 신소리는 어떤가? 신소리는 번역될수 있는가? 없다. '가역성 없음'이다. 한 마디로 '불가역적(不可譯的)'이다. 보편성 없음, 일반성 없음에서 오는 '번역될수 없음(Untranslatability)'이다. 번역될 수 없다는 것은 보편성이 없다는 뜻이겠다.

고스란히 번역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번역을 견딜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우리 문화와 예술 종사자들에게 한동안 이 가역성과 불가역성을 화두로 들 것을 제안한다. 문화와 예술이라고 하는 것은 번역을 견디지 못하면 곧 골목 문화, 골목 예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나는생각한다. 가역성이 없는 문화와 예술은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살아남기 어려울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세계 무대는 언감생심이다.

그렇다면, 보편성이 없다시피한, 다른 말로 하자면 가역성이 거의 없다시피한 한국말 신소리의 반대편에 무엇이 있는가? 그 자리에는 수천년 또는 수백년 세월이 흐르도록 그 보편적이고도 상징적인 의미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신화가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내가 이 자리에서 '잃어버린 신발' 모티프가 아우르는 보편적이고도 상징적인 의미 체계에 합류해야 한다고 주장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우리 사회 한 모퉁이에는 우리의 문학이 세계의 문학에 합류하지 못한다고 문학 종사자들을 원망하는 소리가 있는 것으로 나는 알고있다. 세계 문학의 정점에는 노벨 문학상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논란의 여지가 없지 않지만, 일단은 그렇다고 하자. 노벨문학상, 우리는 왜 안 되는가?노벨 문학상 타령하기 전에 한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하나있다. 우리말의 역사가 그것이다. 우리는, 수천년 동안 입말(口言) 따로, 글말(文語)따로 써온, 우리의 슬픈 문학사를 돌아다 보아야한다. 불과 1백수십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우리의 입말과 글말은 서로 다르지 않았는가? 글말이입말에 합류한 것이 언제던가? 이인직이 '혈의 루'를 써낸 시점으로 잡으니, 불과 1백20년전이다.하지만 '한글 세대'라는 말이 나오기까지 우리말은 또 한차례의 길고 긴 잠복기를 맞는다. 우리글말은 얼마나 젊은가?

이 젊은 그릇에 보편적인 것을 담아야 한다. 그것이 문화가 살 길이다.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