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사람들에게 두눈을 수건으로 가리고 길을 걷게 한뒤 옆에서 '물웅덩 이가 있다!'고 외치면 대부분 주춤하거나 걸음을 멈출 것이다. 며칠째 맑은 날씨가 계속돼 비가 온 일이 없다는 사실을 생각할 틈도 없이, 또 땅이 말라 있다는 사실을 순간적으로 떠올렸다 하더라도 무의식적으로 걸음을 멈추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어떤 사실이 황당무계하다는 것을 간단히 판단할 수 있 음에도 사실과 다른 유언비어적인 암시에 쉽게 걸려 드는것은 미래예측에 대 한 불안을 느끼고 있을때 곧장 일어나는 심리현상으로 본다.
요즘 지역사회에 갖가지 유언비어들이 떠돌면서 가뜩이나 어려운 기업들을 곤혹스럽게 하고 있는 것이나 청구그룹 '리스트 수사'를 둘러싼 각종 루머들 이 지역 분위기를 더욱 어수선하게 만들고 있는것도 지역민들의 정서가 바로 그러한 내일을 예측 할 수 없는 불안속에 옭매여 있음을 반증한다. 대구 경 북사람들이 겁많고 루머에 약한 우민(愚民)이어서가 아니다. 나라 전체가 온 통 한치 앞을 내다 보기 힘든 안개속에 갇혀있는데 대구.경북사람들이라고 해서 저혼자 뚝심좋게 '웅덩이다!'고 해도 두눈 감고 뚜벅뚜벅 걸어 갈 수는 없을 만큼 지역사정이 말이 아닌 탓이다.
그러나 아무리 지역 경제가 기울고 정치적 정서가 불안스럽다 해도 악성루 머 말 한마디에 울고 웃는 경신성(輕信性)을 보여서는 안될 것 같다. 루머에 대한 경신성이야말로 우민(愚民)의 특성이기 때문이다. 이번 기회에 우리가 냉정히 짚어봐야 할 것은 왜 지역에 걸핏하면 악성루머가 생성되며 쉽게 우 민이 되느냐는 사실이다.
지난 날에도 우리는 지역내에서 악성루머를 내부에서 퍼뜨리고 믿음으로써 지역 경제를 제손으로 뒤흔들었던 전과가 적지 않았다. 쓰러진 기업내부에도 문제가 없지는 않았겠지만 80년대초 광명그룹의 도산이 촉진된 것도 경쟁업 체가 퍼뜨린 악성루머가 원인(遠因)이 됐다는 게 정설이다. 당시 루머의 진 원지가 지금의 청구였다는 유언비어도 떠돌았다. 물론 지금처럼 군부나 정계 에 대한 정치적 로비설도 감초처럼 빠지지 않았었다.
웬만큼 기업이 크면 어떻게 해서든 끌어 내리거나 온갖 루머로 헐뜯어 못 살게 구는 지역 정서때문에 본사를 서울로 옮겨버리는 게 속편하다는 기업가 들이 없지 않았던 사실도 이기회에 곰곰 생각해보자. 국민정부가 들어서자 일부 기업인들사이에서는 벌써부터 국민회의 쪽으로 줄서기가 끝났다는 뼈있 는 냉소들도 지난 2월초에 이미 들렸다. 사실이면 사실인데로 지역의 자존심 이 부끄러운 일이고 사실이 아닌 루머라면 그 역시 낯뜨거운 '입초시'였다. 더 딱한 노릇은 그런 루머들이 때때로 얼추 맞아 떨어진다는 사실이다. 청구 리스트 수사만해도 장회장이 요로에 돈을 뿌렸다는 루머는 몇해전부터 떠돈 얘기다. 지역 건설업체의 화의신청 소문도 신청 훨씬전부터 이미 떠돌았고 또 맞아 떨어졌다.
루머라고 다 거짓부렁이 아니더라는 그런 경험들이 선량한 지역민들로 하 여금 유언비어에 쉽게 기울게 해온 점도 없지 않다. 이렇게 되면 유언비어가 떠돌아도 무조건 믿지 말라고만 할 수도 없게 된다. 무조건 '나를 믿으라'는 말은 무의미하다. 믿어라고 말한 사람을 믿는 것은 그말을 하기전 부터 이미 말한 사람을 믿고 있기 때문이지 그말을 듣고 나서 믿게 되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지역의 유언비어를 길라잡이해줄 수 있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나 기관, 집단이 있다면 유언비어의 희생과 피해는 어느 정도 줄이고 막을수 있다. 그것이 지역 언론이든 자치기관이나 민간단체든 또는 정신적 지도자든 큰어른처럼 신뢰받는 지역의 '중추'가 있어야겠다는 얘기다. 눈을 감고 걸으 라고 하면 믿고 걷다가 설사 웅덩이를 첨벙 밟게 되더라도 불평없이 따르고 말한마디에 지역루머를 잠재울 수 있을만한 큰 어른의 존재가 아쉽다. 박정희 대통령이 지역대학의 노총장으로 살아 남아 있었다면 그런 큰어른 의 역할을 했을까. 지금 우리에게 그런 큰 존재가 없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지역의 중추를 만들어 내려 하지도 않았고 어쩌면 모두가 서로 '제잘난 탓' 때문에 큰 어른이 생겨날 수 없게 한 풍토는 없었든지 성찰해 보자. 이제는 우리 지역에도 큰 어른을 받들어 세울 때가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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