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운명직전 "독립후 써달라" 거금 내놔

"할머니가 위독하시다는 말씀을 전해듣고 만주 길림성 교화에 살던 아버지랑 제가 달려갔습니다. 할머니는 사람이 죽고 사는게 먹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에 달려있다. 독립은 정신으로 이룰 수 있다고 하시며 당시로는 꽤 거금인 중국돈 2백48원을 내놓으셨어요. 독립되면축하금으로 써라구요"

운명 일보직전까지 나라의 독립을 기원하고, 독립축하금까지 내놓았던 경북 영양출신 독립여전사 남자현여사(1872~1935)의 친손자 김시련씨(76·전 안동 길원여고 교장·현 서울시하월곡동)는 남자현여사의 임종을 이렇게 증언했다.

만주국 일본대사를 처치하려다 구속, 혹독한 고문끝에 옥중단식을 감행했던 남자현 여사는단식 보름만에 가사상태에 이르렀고, 일경은 병보석으로 풀어주었다. 풀려난 남자현여사는워낙 굶어 입으로 뭘 넘기지 못할 상태여서 만주 적십자병원에서 항문으로 우유 등 영양분을 공급했으나 연명할 것 같지 않았다. 곧 우리나라 사람이 경영하는 조선여관으로 자리를옮긴 남여사는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직감, 목욕 재계하고 아들 김성삼(한국에서의 이름은 김영달)이 준비해온 옷으로 갈아 입었다.

생전에 독립을 보지 못하고 죽는 것을 한으로 품은 남여사는 아들과 손주의 손을 맞잡고 거금 2백48원을 쾌척하며 독립은 정신으로 이루어진다는 내용을 포함한 세가지 유언을 남겼다.

두번째 유언은 손자 김시련을 꼭 대학까지 공부시켜라는 것이고, 세번째는 친정 종손 남재각(영주시내 초등학교 교감 역임)을 찾아서 친정문화를 잊게 해달라는 것이었다.그리고 남여사는 "나를 깨우지말라"며 수면에 빠졌다. 옆에 누웠던 김성삼이 숨결이 이상하여 깨우기를 세번째 거듭할 때쯤 남여사는 영면의 길에 들었다. 향년 61세. 장례는 백계 러시아식 사회장으로 치뤄졌고, 장례식에는 독립투사 박해사, 김정식등이 참여했다.김성삼과 김시련은 남여사가 독립운동을 하는 바람에 여러번 퇴거명령을 받았고, 한때는 하얼빈을 떠나 신의주에 머물렀다. 아들 김성삼은 육군 사관학교 8기생으로 6·25에도 참가했으며, 육군 중령으로 제대했다.

남자현여사는 하얼빈 농대를 졸업한 맏손자 김시련을 비롯, 김시복(전 원호처 차장 안기부제2특보), 김시윤(사업) 등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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