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발굴… 여성운동 대구·경북 1백년-독립여전사 남자현 중

항일투사이던 남편(김영주·경북 영양 출신)이 숨진후 20여년동안 몽매에도 잊을 수 없던지아비와 빼앗긴 조국을 되찾는 방편으로 3·1 만세사건에 적극 가담한 남자현은 왜경의 끈질긴 수배를 피해 47세에 만주로 망명길에 올랐다.

선각 독립투사들이 이미 건너와있던 만주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 가입, 남성들과 어깨를마주하고 넓은 지역에서 마음껏 독립 운동에 헌신한 남자현은 뜨거운 가족애를 조국애로 승화시킨 여걸이었다.

"이제야말로 남편의 원수를 갚고, 빼앗긴 조국을 다시 찾게 되겠구나"하는 무한한 가능성에의 기대를 걸었던 남자현은 부군의 친족인 일송 김동삼과 함께 광복운동에 적극 동참했다.재만 독립운동단체와 군사기관 및 농촌에까지 다니면서 우리 동포에게 조국정신에다 독립운동의 필요성, 일제의 만행과 가공할 침략상을 하나하나 차분히 분석, 폭로하면서 투쟁할 것을 호소하였다.

'왜 우리는 싸워야만 하는가'라는 제목을 통해 눈물을 흘리며 조극의 비참한 현실을 통절히설명하고 속히 독립하는 길만이 자립하는 길이라고 역설하였다. 부녀자에게는 방구석에만앉아있을 것이 아니고 나서서 빼앗긴 조국을 찾아야한다고 절규하였다. 일본은 결코 가만히앉아있는 우리에게 그네들이 탈취해간 조국을 넘겨주지 않을 것이라고 뼈저린 연설을 여러곳에서 되풀이하였다. 애국은 곧 독립운동 대열에 참여하고 물심양면으로 협조하는데 있다고 역설하였다고 '한국독립운동사' 제2권(국사편찬위원회 간행, 1966년 판)에 적혀있다.남자현은 북만주 일대 12곳에 교회와 예수교회를 건립하고 10여개의 여자교육회도 설립, 여성계몽과 독립운동에 힘쓰며 무지와 몽매는 무서운 적이라고 갈파하면서 알아야 산다며 교육도 스스로 맡고 나선 것이다.

1925년에는 이청산(李靑山) 채찬(蔡燦)과 함께 재등총독을 암살하기로 모의하고, 귀국하여서울 혜화동에 잠복해서 공작하다가 미수에 그치고, 다시 만주로 탈출하였다.

남지사는 그후 길림에서 각지에 흩어져있는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에 노력하여 기밀통신과 연락사무의 책임을 맡았다. 이때 만주왜경은 우리 독립운동기관들을 철저히 감시하였으나 우리 교포의 부녀자에 대해서는 수준을 얕보아서 부녀의 통행과 행동감시에는 소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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