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쇳물영화' 재현 활로모색 안간힘

IMF 7개월. 이 기간 '산업의 쌀'이라는 철강재를 생산하는 포항공단에서 나타난 외형적 특징은 공장 굴뚝에서 뿜어내는 수증기량이 급감했다는 것이다. 이는 곧 조업률 하락과 문닫는 업체의 증가를 의미한다.

공단을 관통하는 제철로(31번 국도)를 사이에 두고 포철과 철강공단으로 구분되는 포항공단전체의 입주 업체수는 모두 1백76개. 모두가 철강관련 업체다. 그러나 이중 휴폐업 업체가14개. 또 지난해 9월까지만 하더라도 이론상의 생산한계를 넘어 1백5∼1백10%를 기록하던가동률이 이달들어서는 70% 이하로 떨어졌다. 종전 2만명(포철제외)이던 공단 근로자수도 1만7천명으로 3천명이 줄었다. 이와함께 재고량은 적정치의 2∼3배에 육박, 더 이상 쌓아둘자리가 없을 정도로 심각하다. 이같은 수치가 "우리에게 불황은 없다"던 포항공단의 현주소다. 왜 이렇게 됐을까.

국내 최대규모 전기로업체 강원산업 민영화이사(49)는 "그동안 우물안 개구리 처지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말로 설명했다. 제품을 아무리 많이 만들어도 공급이 달릴정도로 정신없이 팔려나가는 통에 체질강화에는 사업주나 근로자 모두 관심이 없어 위기대응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는 진단이다.

동국제강 김상조상무(53)도 "불황이 없었기에 업계전반의 상황 점검없이 개별기업별 설비확장은 계속됐고 급기야는 국내 업체간 출혈경쟁이란 상황을 불러왔다"며 일찍이 바깥으로 눈을 돌리지 못했던 사실을 문제점으로 지적했다.

이같은 대기업의 사정은 중소기업에도 그대로 적용됐다. 대기업 철근이 잘팔리면 중소기업도 철근을 생산하고, 빔(BEAM)이 잘 팔리면 덩달아 빔을 만들어 판매했다.

최근 부도를 낸 지역중견업체 대표 김모씨(58). 김씨는 부도이유를 "일시적인 자금난을 이기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밝혔으나 금융계에서는 이보다 "무리한 사업확장 탓"으로 지적했다.사업전망이 불투명한 상태에서 중소기업이 대기업을 쫓아가기 위해 수년째 사업을 확장하다IMF사태를 맞자 여지없이 주저앉고 말았다는 뜻이다.

반면 "다 죽는다"며 아우성치는 상황에서도 잘 나가는 기업은 있다. 철선(鐵線·타이어코드)제조업체 (주)홍덕스틸코드. 자동차 타이어 보강제로 사용되는 머리카락보다 가는 철선을 만드는 이 업체의 월매출액은 60억원 정도로 IMF 이전이나 이후나 별차이없이 꾸준한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지난 96년 설립한 이 업체의 성공요인은 제품특화 및 군살제거. 이 회사에서 만드는 제품은오직 타이어코드 한가지 뿐이다. 또 1백50명의 직원관리 및 회사경영을 맡은 임원은 단 2명.판매는 내수와 수출을 각각 절반씩 섞어 상호보완적 시장정책으로 내수가 막히면 수출로 판로를 뚫고 수출전선에 먹구름이 끼면 내수에 치중하는 방법을 구사해 급락과 급등으로 곡예를 타는 타업체들과는 크게 비교된다.

이 회사 남지우차장은 "타이어코드에 관한한 기술과 품질등 모든 면에서 전세계적으로 우리회사가 최상위권"이라며 "중소기업이 살아남는 방법은 전문분야를 개척, 확실하게 자리잡는길 뿐"이라고 말했다.

이같은 상황에서 포항공단 업체들은 외화난으로 시작된 경제위기의 탈출 방법으로 수출량증대라는 방법을 선택했다. 재고도 줄이고 달러도 벌겠다는 전략. 올들어 지난 5월말까지 포항항을 통한 수출액은 모두 10억3천4백만 달러로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1백23%가 늘어났다. 업체들의 올해 수출실적이 대부분 '사상최고'를 기록했다.

그러나 최근들어 수출 전선에 이상기후가 감돌아 업체들이 긴장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철강업계의 주된 수출대상지인 동남아지역마저 외환위기로 시장이 침체되면서 판로가 막혀버렸기 때문. 또 미국과 유럽에서 저가공세를 펼치던 우리기업이 덤핑 제소를 당하는 사례가 빈발하고 말레이지아등 일부 국가에서는 국내 업체끼리 출혈경쟁을 벌여 국가적 망신도자주 목격되고 있는 등 국제시장에서 불안한 조짐들이 감지되고 있다는 것이다. 철근의 경우 t당 2백90달러를 받아야 손익분기점에 도달하는데 우리 업체들끼리 과당경쟁이 벌어져 2백20달러까지 가격이 떨어졌다는 것.

포항철강산업단지관리공단 박재호관리부장(45)은 "호황기때는 내수시장에서 서로 경쟁하고,불황시에는 해외에서 저가출혈 판매로 다퉈 국가적인 채산성은 더욱 떨어지고 있다"며 "철강협회 또는 정부차원의 계획적인 판매정책이 절실하다"고 지적했다. 한편 'IMF 경제신탁'이라는 비상상황을 맞이한 후 정부와 경북도 포항시등은 근본적인 체질개선을 통한 공단전체의 경쟁력 강화방안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이들은 포항테크노파크 조성을 통해 산학연연계 강화를 통한 경쟁력 강화와 항공기부품등 신금속분야 업종을 유치해 현재의 중후장대(重厚長大)형 산업구조를 경박단소(輕薄短小)형으로 개편하고 정보통신 및 전기전자등 첨단업종을 유치한다는 대안을 제시했다. 또 상의등 경제단체들은 포항을 수출자유지역으로 지정하는 방안도 추진중에 있다.

반면 업계는 이같은 장밋빛 구상보다는 현재의 위기돌파를 위해서는 정부 주도로 산업체에대한 자금지원폭 증대, 각종 규제완화 및 일시적 제한, 세제혜택등 단기적이고 실질적인 조치가 없는한 2000년대를 향한 원대한 청사진도 한낱 구호에 불과해질 것이라며 정부가 현재상황을 정확하게 진단하고 이에맞는 대책을 세워달라고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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