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양국 외무장관 회담 결렬

한국과 러시아간 외교관 상호추방 사태를 수습하기위한 박정수외교통상장관과 예브게니 프리마코프 러시아 외무장관의 26일 마닐라 회담은 한국측의 '외교실패'로 끝나고 말았다.지난 4일 주러시아 조성우 참사관 추방사건 이후 20여일만에 열린 이날 외무장관 회담을 계기로 한국은 외교분쟁을 매듭짓고 한·러시아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게되기를 희망했으며,그 결과에 대해 확신하고 있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회담은 정반대 방향으로 흐르고 말았다. 회담은 당초 예정시간인 45분을 30여분간넘겨 계속됐으나, 양측은 정보담당 외교관 맞추방 사건을 놓고 설전을 벌인 끝에 아무런 소득도 없이 끝나고 말았다.

프리마코프 장관은 회담직전 사진촬영 때부터 굳은 표정을 지어보였으며, 회담시작후에는조참사관에 대한 대응조치로 올레그 아브람킨 참사관을 맞추방한 한국정부의 태도를 시종물고 늘어졌다는 후문이다.

당국자는 "외교관 추방사태에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 다른 안건은 전혀 논의조차 하지 못했다"고 말해 심각했던 회의분위기를 전했다.

김대중대통령의 내년 봄 러시아 방문, 오는 11월 아·태경제협력체(APEC)회의기간의 양국정상회담 추진문제는 물론 대러시아 경협차관 문제논의를 위한 한·러시아경제공동위 개최문제가 회담의제로 다뤄지지도 못했다는 설명이다.

특히 사전브리핑에서 정부 당국자가 통상적으로 외교채널을 통한 실무협의를 거쳐 장관회담에서 추인을 받는 정상회담 추진문제에 대해 '성사가능성이 높다'고 자신했던 점을 감안할때, 정작 회담에서 한국측이 이에대해 말도 꺼내보지 못했다는것은 이번 회담에 임하는 외교당국자들의 최대 실수라고 외교전문가들은 지적하고 있다.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회의 참석차 박장관을 수행한 외통부 당국자들은 한결같이 "매우이례적인 일"이라며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이같이 한·러시아외무장관 회담이 꼬이게 된 것은 외교통상부 당국자들의 안일한 태도 때문이라는 비판론이 우세하다.

러시아 해외정보국(SVR)에서 한국이 5명의 외교관을 자진철수하는 것으로 외교분쟁이 끝났다고 발표한 것만 믿고 이번 회담이 끝내기 수순을 밟는 자리로 생각한 자체가 문제라는 지적이다.

특히 외교당국자가 양국 외무장관회담 직전까지 러시아측의 분위기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채 "잘 될 것"이라고 자신했던데 대해서도 '정보부재와 치밀한 준비부족의 대표적인 사례'라는 비판이 대두되고 있다.

외교당국의 이같은 안일함에 대해 우리측 정보당국은 이미 지난주부터 "이번 사건은 끝난게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고 경고메시지를 보냈으나 러시아담당 주무국장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회담 하루전에도 되풀이 강조했다.

이에따라 이번 외무장관회담의 실패는 러시아의 대 한반도정책이 남북한 등거리 외교를 통해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경고를 무시하고, '봉합'이라는 고속도로를 질주하려다 발생한 외교사고라는 비난을 면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양국 외무장관 회담의 결렬로 한·러시아간 외교분쟁은 새로운 갈등국면에 빠지게 됐으며,그 파장은 상당기간 계속될 것임을 예고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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