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시론-국가, 시장 그리고 사회적 합의

아시아적 가치의 몰락이 자주 들먹거려진다. 한국, 태국, 인도네시아가 IMF 관리체제하에놓인 마당에 일본경제마저 흔들리다보니 설득력 있는 담론으로 자리굳히는 모양이다. 시민사회가 제대로 성숙되지 못한 가운데 국가주도로 경제발전을 추진하던 아시아 국가들이 관치금융이나 전근대적 정실주의 등으로 인해 그 한계를 노정하고 있다는 것이다.새겨 들을만한 말이다. 특히 시민사회의 미성숙은 문명사적 대전환의 이 시대에 아시아 국가들이 극복해야 할 최대의 과제임에 틀림없다. 문제는 성숙된 시민사회의 모습을 어떻게상정하는가에 있다. 아시아적 가치의 대안이 과연 발가벗은 약육강식의 시장가치 그 자체인가? 관치금융이 재벌과 초국적투기자본 지배의 금융구조로 대체되기만 하면 그만인가?패권주의적 정치풍토와 정경유착의 고리를 차단하고 민간부문의 창의력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시장경제의 정착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시장이 새로운 경제적 패권주의의 장일 수는없다. 패권주의적 정치논리로부터 탈피해야 한다는 명제가 패권주의적 경제논리의 지배를정당화할 수는 없다.

국가개입이 무조건 죄악시 되어서는 안된다. 시장이 게임의 틀을 준수하는 건전한 경쟁의장, 창의력 발휘의 장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틀을 짜는 것은 국가의 몫이요 바로 정치의 몫이다. 민간주도의 발전모델이 그대로 국가 배제의 자유방임모델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새로운 발전모델을 강구하는 행위 자체가 이미 정치행위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시장이 제대로 형성되어 제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국가적 통제, 정치적 통제가 불가피하다. 다만 그 통제양식이 전근대적 정실주의와 정경유착으로부터 벗어나 현대적 합리주의의 모습으로 바뀌어야 할 뿐이다. 새로운 통제양식의 핵심은 사회적 합의에 기초한 조정·통제라는데 있다. 사회적 합의는 성숙한 시민사회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시민사회의 성숙이단순히 중산층의 양적 확대를 의미하는 수준으로 이해되어서는 곤란하다. 성숙한 시민사회의 형성은 다양한 주체적 이익집단의 갈등 조정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데서부터 출발해야한다. 건전한 시장의 효율적 기능을 담보하는 국가적 통제는 사회적 합의의 제도화가 이루어진 바탕위에서만 가능하다는 말이다.

구조조정과 고용조정의 필요성이 긴박하면 할수록 노사정위원회의 원활한 기능이 요구되는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구조조정이란 다름아닌 기득권 구조의 개혁을 의미한다. 기득권층의자기방어를 위한 구조조정은 이미 구조조정이 아니다. 설사 그것이 소위 '경제논리'의 옷을입고 있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사회적 합의의 틀 자체를 정치논리에 입각한 비시장적인발상으로 매도하는 자유방임적 신자유주의의 경제논리는 시장경제의 본질을 왜곡하는 반시대적·반개혁적 기득권 옹호의 논리에 불과하다.

새로운 도약을 위해 우리가 서둘러야 할 일은 우리 사회를 하루빨리 성숙한 시민사회로 재구조화하는 일이다. 성숙한다는 것은 스스로 자기주체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숙한다는것은 동시에 자신의 주체적 이해관계를 사회적 합의의 틀속에 용해시켜 객관화할 수 있다는것을 의미한다. 제2의 건국은 바로 여기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핵심적 이해당사자인 노동단체를 아직도 사회적 합의의 틀 안에 제대로 정착시키지 못한 마당에 구시대의 관변단체들을 제2건국운동의 주체로 내세우겠다는 성숙하지 못한 발상은 씁쓸한 여운을 남긴다.(권기홍 영남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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