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발굴...여성운동 대구.경북 1백년(35)-백신애

여류로서는 처음으로 신춘문예에 등단한 백신애는 소설 '나의 어머니'가 상징하듯 효녀였지만 나라를 잃은 여성으로서 부모의 귀여움이나 차지하며 차분히 붓대만 놀릴 수는 없었다.더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배우고 싶었다.

1930년 마침내 그녀는 일본 동경으로 건너갔다. 일본대학 예술과에 몸을 담고 문학공부를체계적으로 배워나갔고, 연극에도 눈길을 돌려 체홉의 작품이 공연될때 주연을 맡기도 했다.과년한 외동딸이 문학과 연극에 혼을 빼앗기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아버지 백내유는 더이상일본땅에 머물지 못하도록 불호령을 내렸다. 돌아오자마자 뜻밖의 함정이 그녀를 기다렸다."네 나이 벌써 스물 셋, 시집을 가서 아들딸을 낳아도 몇씩이나 낳았을 것이다. 부산 갑부집아들에게 시집가거라"

단도직입적인 아버지의 하달은 결혼의 기쁨이나 설렘보다 하고싶은 것을 꺾인데 대한 분노와 결혼기피로 이어져 백신애의 든든한 후원자 역할을 한 어머니 이내동여사에게만 귀띔해놓은채 다시 현해탄을 건너 일본으로 날아가버렸다.

1932년 일본에서 완전 귀국했을때 그녀에 대한 아버지의 감시는 이만저만한게 아니었다. 아버지가 반야월에 조성해놓은 거대한 과수원에 파묻혀서 글쓰기에 몰두하다가 33년 26세의나이로 아버지 공장의 관리인으로 근무한 전직 은행원 이근채(李根采)와 대구공회당에서 신식 결혼식을 올렸다. 하지만 이근채는 초혼이 아니라 재혼이었다.

자녀를 데리고 상처한 이근채에게 처녀시집간 백신애는 송정마을(현 대구시 동구 괴전동)에신혼살림을 차리고 '꺼래이' '복선이''채색교''적빈''낙오''악부자''정현수'등 왕성한 작품활동을 하고, 서울 삼천리사 초청 여류작가 좌담회(김동환 사회, 박화성 이선희 모윤숙 장덕조최정희등 참석)에도 참석하는 등 활동을 폈지만 몇년 안가 결혼 파국을 맞았다.백신애에게 사상적 영향을 가장 많이 끼친 오빠 백기호(白基浩)의 며느리(백신애의 친정 질부)인 허필숙 전 계명대 가정대학장(사진)의 증언-. 허교수는 시조모인 이내동여사(백신애의모친)를 오래 봉양한 시어머니(이정태.李丁太)와 함께 살았다.

"사상이 앞서가니 딴 사람들이 그녀를 이해하지 못했어요. 결혼이후 글쓰고 문인들과 교류하는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고 보통 아낙네들처럼 집안에 가둬 두려니 부부 싸움이 잦았고,가정폭력까지 당한 것 같아요"

여러가지로 맞지않는데다가 남편의 주먹세례까지 겹쳐 결혼생활에 염증을 느낀 신여성 백신애는 아버지가 해준 과수원도 그 많은 살림살이 일체도 다 내팽개친채 입은옷 그대로 친정으로 달려와 머물렀으며 끝내 이근채와 이혼했다.

"어릴때 관상쟁이가 두루마리에 33세에 생이별.사이별 관상이 들어있다고 했다는데 33세에이혼하고 죽었으니 참 뭐라고 해야할 지..."

파경후 친정에 돌아온 백신애는 도량이 넓은데다 온 집안의 일을 혼자서 다 치러낸 여장부였던 어머니 이내동여사를 위해 글을 써서 읽어드릴 정도로 효심이 지극했으며 성격은 섬세.명랑했으며 놀때는 천진난만한 어린애같았다.

1936년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살사건이 일어나고, 총독부의 애국지사에 대한 감시가 심해지면서 전부터 애국부인단체와 인연을 맺고 있던 백신애와 오빠 백기호는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했다.

그해 10월에는 급기가 총독부가 사상범 감찰을 위해 경성과 평양 광주등 주요 7개 도시에감찰소와 출장소를 설치하기로 하여 애국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발을 붙이고 살 수가 없게되었다.

남매는 일본경찰의 눈을 피해 상하이로 숨어들었다. 비록 왜경의 감시를 받기는 했지만 소설가 감로향과 교류하며 비교적 자유롭게 지냈으며, 위장병이 심해졌던 백신애는 오빠의 손에 이끌려 귀국한다.

친일이 아니고는 부를 축적할 수 없다는 논리때문에 친일파로 몰리기도 했던 백신애의 아버지는 과수원을 하면서 일본.중국으로 실어내던 나무사과상자의 속을 교묘히 파내고 금붙이를 넣어서 만주로 독립군자금을 부치기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39년 6월 경성제대병원에서 사망한 백신애는 화장, 그 유골이 경북 칠곡 동명에 있는 가족묘지에 안장됐으나 남북으로 갈라진 분단국가에서 가족이 남북으로 흩어지면서 좌익으로 몰려 알게 모르게 사회생활에 많은 지장을 받았던 친척들에 의해 묘가 파헤쳐지는 수난을 받은채 오늘에 이른다.

농촌과 빈궁을 소재로 여성의 피해의식을 다각도로 그려나가며 초지일관 항일의지를 굽히지않은 여성운동가요 여류문인이었던 백신애 재조명 작업은 아무리 강조돼도 지나치지 않을것 같다. 〈崔美和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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